관계를 끊는다고 해서 곧장 평온이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빈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또 다른 사람들의 말이 밀려들어왔다. 마치 내 안에 남은 공간을 자신들의 목소리로 채우려는 것처럼, 새로운 조언과 충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전 글이 ‘관계를 끝맺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글은 조금 다르다. ‘관계를 맺은 후, 그 안에서 어떻게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글이다. 사실 이 두 이야기 모두 조울증의 정서적 재발 신호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내 선택이 틀릴까 봐 두려웠다. 무언가를 잘못 선택하면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속에 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스스로를 믿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살폈다. 선생님, 친구, 가족…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있어야 비로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타인의 말은 나에게 안전장치처럼 느껴졌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점점 자존감의 빈틈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조울증이 삶에 들어왔다. 감정의 진폭이 커지면서 흔들림은 더 심해졌다. 기분이 고양된 날에는 누군가의 조언을 무리하게 실천하고, 가라앉은 날에는 모든 말이 비판처럼 들렸다. 어떤 날은 “그렇게 하지 마”라는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온몸이 얼어붙었고, 다른 날에는 “넌 잘하고 있어”라는 말을 무턱대고 믿고는 감당할 수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남의 말 한 줄에, 내 감정선 전체가 요동쳤다.
이제는 누구나 조언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검색 몇 번이면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정답 같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블로그, 뉴스레터… 정보가 넘쳐날수록 내 생각은 더 희미해졌다. 나는 점점 더 남의 의견에 기대어 판단하려 했고, 그럴수록 내 안의 ‘나’는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아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흘려보낼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 바로 그 선별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조증 증상 중 하나로 충동구매가 자주 나타났던 나는, SNS에서 나를 겨냥하는 광고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너무도 잘 집어내는 광고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광고를 끄고, 일부러 보지 않는 연습을 했다. 대신 동기부여가 되거나 위로가 되는 콘텐츠, 영감을 주는 영상들만 선별해 보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은 그 방향으로 빠르게 적응했고, 어느 순간 그것들은 나의 감정을 조금은 건강하게 자극하는 자원이 되었다.
나에게 맞는 말을 고르고, 맞지 않는 말은 흘려보내는 일. 그것은 ‘자존감’이란 단어보다는 ‘자기 보호’에 더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 말은 나에겐 해당되지 않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 경계선을 긋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보다는, 적어도 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는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내 삶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LH 행복주택에서 청년 전형으로 살고 있던 나는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전세사기 사건이 계속해서 들려오던 시기였고, 나는 공공임대 쪽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이사 간 오피스텔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관심을 갖고 알아보게 되었다. 무주택자라면 면적에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공공임대였고, 전세사기의 우려도 없었다. 위치도 좋았고, 내 예산 안에서도 가능했다.
하지만 주변의 말은 또 엇갈렸다. 어떤 친구는 “지금 옮기기엔 무리야”라고 말했고, 또 다른 친구는 “좋아 보인다, 그냥 가”라고 했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신청 기간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정말 이곳에 살고 싶어 하는가?’ 마음은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결정은 누가 대신 내려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곧 “너무 조용하다”는 피드백을 듣고 다시 활기찬 척을 했다. 연애에선 “너답지 않다”는 말에 ‘나다움’이 무엇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가족은 “친구는 결국 떠나고 가족만 남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떠난 친구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그 말 한마디에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심지어 글을 쓸 때조차도, SNS나 브런치에 무언가를 올릴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을 예측했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문장을 썼다가, ‘이건 너무 개인적인가?’ 싶으면 바로 지웠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나는 결국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선 남의 말보다 나의 감각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물론 여전히 나는 흔들린다. 누군가가 단호하게 말하면 주춤하게 되고, 내 결정을 내세우는 것이 두려울 때도 많다. 하지만 점점 더 확실해지는 감각이 있다. 남의 말에 휘둘리는 것보다, 나를 믿지 못하고 남에게 기대는 내 습관이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한 자립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흔들리면서도 내 중심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은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연습이다.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 진짜 내가 원하는 건 뭐지?”
그 질문의 답은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함은 늘 두렵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만 나는 내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 타인의 확신은 늘 쉽고 가볍다. 반면, 나의 감각은 어렵고 느리다. 그래서 이 연습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그러나 결국, 내가 믿고 따라야 할 기준은 오직 그 속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
비록 느리더라도, 나에게 맞는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