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아니라 천산갑이었다

<라이프리스트|영화>

by 푸린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에서 나아가,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금기어처럼 피해왔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나는 사랑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영화 《라이프리스트》 속 주인공은 한 아이를 보며 “너는 고양이 같아”라고 말한다. 기다려야만 다가오고, 마음이 열려야만 곁을 내어주는 존재.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고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옛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고양이도 아니야. 갑옷을 겹겹이 두른 천산갑이지.”


천산갑. 위협을 느끼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 딱딱한 비늘 뒤로 숨어버리는 동물. 돌아보니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일찍 단단해졌다. 누군가 먼저 다가와 '확인'시켜줄 때만 겨우 움직였고, 관계가 흔들릴 때면 상대의 마음보다 “나는 버려질 만큼 부족한 사람인가”라는 자기부정에 먼저 휩싸였다. 내게 사랑은 교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요새였다.


이 지독한 애착의 굴레를 끊기 위해 나는 어렸을 적의 나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어 듣고 싶었던 말을 써내려 갔다. 사실상 나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00아, 살아내느라 참 애썼다. 부족한 부분도 있고 미숙해서 실수도 했지만 그게 너를 설명하지는 못해. 늘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책이 심한데 조금씩 내려놓기를 바라. 이제는 누구의 시선도 바람도 의식하지 말고 네가 즐거운 일들을 찾아 나가길 바랄게.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푹 빠지곤 했잖니. 그리고 앞으로의 너의 삶엔 사랑이 가득하길 바란다. 나 또한 너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될게.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주렴. 그리고 꼭! 건강해야 한다. 사랑해.


냉장고에 붙여둔 이 편지를 어느 날 진짜 엄마가 보셨다. 한참을 읽으신 엄마는 그 후로 내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기다려온 그 말을, 내가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타인의 입술을 통해 듣게 된 것이다. 비난 대신 이해로 나를 대하는 '자기 자비'의 시작이었다.


변화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 찾아왔다. 퇴근 후 혼자 운전해 돌아오는 길, 평소라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걸거나 오픈채팅방을 배회했을 시간인데 이상하게 편안했다. 혼자라는 사실이 더 이상 '고립'이 아닌 '휴식'으로 다가온 것이다.



집에 도착해 드라마를 보다가 평소 좋아하던 다락방을 보게 됐다. 습관적으로 쇼핑 앱을 켜고 텐트를 검색했다. 다락방 같은 공간을 사서 불안을 메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 문득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결제 버튼 대신 조용히 주황빛 스탠드를 켰다. 재즈를 틀고 책을 펼쳤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혼자서도 충분한 밤'을 만든 것이다.


정혜윤 작가는 저서 『삶의 발명』에서 말했다. 공허할 때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라고 말해보라고. 나에게 필요했던 '다른 이야기'는 갑옷을 억지로 벗어 던지는 투쟁이 아니었다. 천산갑이면 좀 어떤가. 갑옷은 나를 지켜온 소중한 흔적이다. 다만 이제 나는 그 갑옷 안에서도 평온하게 숨 쉬는 법을 깨달았을 뿐이다.


고양이이기도, 천산갑이기도 한 나는 이제 나를 지키는 방식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나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꽤나 마음에 든다. 말 그대로, 참 좋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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