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기 편한 말들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연주를 위해 곡 선정과 정확한 악기의 편성을 정하고 연습 일정을 정한다. 이 과정에서 비올라와 리허설, 이 두 단어를 지휘자로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꽤나 자주 언급한다.
리허설은 연습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오페라 공연을 위해 무대의상을 제대로 입고 총연습을 하는 드레스 리허설(dress rehearsal), 공연을 앞두고 대중에게 유료로 연습과정을 공개하는 오픈 리허설(open rehearsal)과 같이 파생시켜 쓰기도 한다. 리허설을 통해 지휘자는 여러 연주자들과의 호흡과 소리의 균형 그리고 조율과 약속을 통해 공연을 위한 연주의 질을 높이는 과정을 함께 한다.
여러 악기군과 함께 현악기 소리의 균형을 맞추는데 비올라만큼 중요한 악기가 없다. 바이올린의 고음과 첼로, 더블베이스의 저음 사이에 중성적인 매력과 비올라가 가진 특유의 음색은 정말 매력적이다. 이런 특징을 가진 탓에 비올라는 현악기 군 안에서 고음과 중음을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가진다. 음색과 더불어 이런 역할을 맡는 비올라를 그래서 참 좋아한다.
하지만 비올라와 리허설 이 두 단어는 나에게 지난 2년 동안 작은 불편함을 주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악기의 이름조차 말하기가 힘들다니!
비올라는 독일어로 브랏체(Bratsche)라고 한다. 유학을 가기 전에는 1년에 한두 번 '비올라'라는 단어를 꺼낼까 싶을 정도로 잘 쓰지 않았다. 내 전공이 지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핑계일까? 사실 비엔나에서 지휘를 공부하면서 뒤늦게 비올라의 매력에 빠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자주 언급하게 되었고 나는 브랏체 라는 말을 배운 후 무려 10년 동안 브랏체를 말하며 살아왔다.
한국에서 자주 써야 했던 또 다른 단어 '리허설(rehearsal)'은 나에게 '다시(re) 듣고 확인해본다(hear), 어떤 공간(독일어/Saal, 넓은 장소)에서'라는 자의적 해석 덕분에 2년이 지나서야 말하기 편해졌다. 리허설은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비올라보다 비교적 자주 썼던 단어이기 때문에 말하기 편할 것 같았지만! 언급했던 것처럼 이 단어 또한 2년이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리허설을 독일어권에서는 프로베(Probe)라고 하는데, 동사로 probieren 은 '시도하다', '실행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 이 단어도 10년을, 그리고 브랏체보다 더욱 자주 쓰다 보니 리허설이라는 단어를 내 의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말할 때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브랏체와 프로베를 비올라와 리허설로 바꿀 때까지 나는 10명 내외에서 많게는 5-6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한편으론 한국말이 조금 더딘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어 단어를 말하지 않기 위해 흐름이 잠깐 끊어지는 그 찰나가 한편으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교포도 아닌데 혀가 살짝 굳어 버리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처음 배우고 자주 쓰게되는 말(언어)은 세월이 지나서 바꾸고 고치기가 참으로 힘들다. 한 번씩 국외에서 태어난 한국인과 대화할 때 "저는 영어가 편해요,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을 그저 외국인처럼 대했었다. 하지만 지난 내 경험을 통해 "편해요"라는 말을 이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영어를 쓰기 때문에 영어가 편하겠지만 영어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자주 썼기 때문에 한국어로 바꾸어 쓰면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편하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비올라와 리허설, 이제는 이렇게 쑥쑥 말할 수 있는 나를 보며 요즘은 브랏체와 프로베을 막힘없이 구사하던 예전의 내가 살짝 그리울 때가 있다. 비엔나로 다시 돌아간다면 예전의 언어로 구사할 수 있을까? 그곳을 다시 방문할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