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말하기
오스트리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준비할 때였다. 나는 지난 10년의 삶을 기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독일어 어학 자격증은 어떨까?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내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는지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독일어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아보고 싶었다. 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말하기와 쓰기를 매일 연습하면서 유학생활을 한꺼번에 정산하는 것 같아 한 번씩 가슴이 먹먹해졌다. 과제로 주어진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해 독일어로 말하고 쓰며 내가 가진 쓸데없는 습관을 발견하고 고칠 수 있었는데, 후에 자격증을 따고 나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한국말은 제대로 하고 있나?', '한글을 얼마나 잘 구사하나?'
2015년부터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비엔나에서 당시 활동하는 예술가, 음악가, 교육자들을 매달 인터뷰하고 한국의 한 잡지사에 글을 보냈다. 이렇게 남의 말을 옮겨 적을 때는 몰랐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글에 대한 문제점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비문이 많고 쓴 글을 다시 볼 때도 주술 호응의 부자연스러움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더불어 독서량이 부족한 탓에 어휘가 많이 부족했고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동어 반복 때문에 가독성이 매우 떨어졌다.
이런 나의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알게 된 계기는 국내의 한 전문 예술단체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서울시 선정 전문 예술단체인 에티카 앙상블과 나는 2년 전에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나는 지휘자였기 때문에 공연 때 지휘가 필요한 규모가 크고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이 아니면 딱히 무대에 나설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앙상블의 대표와 함께 기획에 참여하고 그것에 맞는 선곡과 업무에 필요한 문서작업을 돕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공연 특성에 따라 게스트를 섭외하고 진행할 때는 공연 해설을 포함해 게스트를 보좌하고 그에 맞는 대본을 작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공연 대본의 명목으로 글을 쓰고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위해 해설을 시작했다.
사실 글쓰기만큼 말하기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정리가 우선시되지 않으면 말이 산으로 가는 경우를 경험한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내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던 생각을 자꾸 종이에, 화면에 꺼내놓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복되고 쓸데없는 내용을 자꾸 솎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니 눈앞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 문장을 다시 읽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생각이 정리가 되어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 좋았다. 이런 과정을 한 두 번이라도 덜 거치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매번 욕심을 낸다. 그러면 말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글쓰기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 대본을 쓰는 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에게 좋은 핑곗거리다. 게다가 내가 쓴 글을 한 달에 한 번 반드시 무대에서 발표해야 하는 과제도 덧붙는다. 물론 공연을 앞둔 ‘마감기한이 있는’ 글쓰기란 누구에게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한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수정하기도 하고 한 글자도 못 써서 잠을 설친 적도 많다. 하지만 내 글쓰기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는 좋은 동기이자 훈련임은 확실하다. 글로써 생각을 내어놓고 정리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을 그래서 몸에 더욱 붙이려고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 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라며 유시민 작가님이 말씀하셨다. 언젠가부터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에도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쉽게 말을 꺼내지 않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무엇보다 온몸으로, 삶 전체로 글을 쓰고 있는 과정에 진입한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