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속도
아침 출근길 합정역은 2호선과 6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사람들의 뒤통수와 등짝만 보며 따라가다 보면 계단을 올라가는 줄에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게 된다. 2호선 환승 통로 끝에 나타나는 에스컬레이터는 그 편의성 때문에 항상 줄이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단 줄을 택하는 편이다. 출근길에서라도 그동안 부족했던 운동을 계단 오르기로 대신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있다.
올라가는 동안 앞사람의 운동화와 구두가 계단을 딛는 모습을 본다. 승강장에 접근하는 열차를 잡아타려고 급히 뛰어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계단으로 올라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걸어 올라가는 속도가 비슷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계단을 딛는 소리와 양발의 움직임이 뒷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사실 계단을 함께 올라가는 것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가 동일한 경우는 정말 드물다.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자주 그리고 오래 걸어 다니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바로 발걸음의 속도는 그 사람의 생각의 속도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안단테(andante)의 ‘빠르기말’을 가진 작품이 있다. 안단테는 명사로 ‘걸음걸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andare(안다레)’의 형용사형이다. 악보에 써진 모든 정보를 해석하고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의 특성상 이 빠르기말은 연주자에게 연주 속도(템포)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안단테’라고 쓰면 모두가 “걸음걸이의 빠르기로”라고 해석한다. 사실 오랫동안 이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전 세계 모든 인간의 다리 길이, 발의 크기와 보폭이 같지 않을뿐더러 걸음의 속도도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텐데 어쩌면 저렇게 무책임한 빠르기 말이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음악은 ‘작곡가가 정해놓은’ 속도에 알맞은 리듬과 멜로디로 써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연주 속도를 정하면 음악이 정말 괴상하게 들린다. <학교종> 노래를 우리가 보통 부르는 속도보다 8배 느리게 부르면 “학교종이…”에서 이미 숨이 달려 “… 땡땡땡”까지 부를 수 없거니와 그 느린 템포 때문에 “선생님이 우리를 이렇도록 애타게 기다릴 만큼 구슬픈 스토리였던가?”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클래식 음악 악보 가장 첫 부분에 나타나는 ‘빠르기말’은 단순히 작품의 연주 속도만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안단테’를 예로 들면 “걸음걸이의 빠르기로” 연주를 실행하기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던 중에 내 스승님이 지나가듯 “강조점(강한 박자감) 없이 연주하라”며 안단테의 연주법을 알려주셨다. 보통 마디의 첫 박자는 강한 박자감을 가지는데 '안단테' 곡에서는 첫 박의 특징을 조금 부드럽게 가져가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연주하니 정말 분위기도 온화하고 마치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저런 결과에 도달했는지 알고 싶어 졌다. 왜 안단테가 강조점 없이 연주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길에서 사람들의 걸음을 관찰하던 중에 걷는 속도가 아닌 걷는 행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몸이 불편해서 절뚝거리며 걷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한쪽 발을 굳이 강하게 구르며 걷지 않는다. 몸의 중심이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딛는 우리 발걸음은 ‘강조점 없이’, ‘그냥’ 걷는다. 저게 안단테였다니! 그날의 기분 좋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영국의 작곡가 엘가가 사랑하는 자신의 부인을 위해 작곡했던 <사랑의 인사>의 ‘빠르기말’은 안단티노(andantino)다. 축소형 어미 ‘-ino’가 붙었지만 같은 안단테 족(族) 음악이다. 애처가로 알려진 엘가는 안단테가 가진 의미처럼 서로의 발걸음(andante)을 맞추고 삶에서 특별한 위기(강한 박자감) 없이 무탈하게, 남은 생을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살아가고픈 소망을 이처럼 곡에 녹여냈는지도 모른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2호선 지하철에 타기 위해 가쁜 숨을 내쉬며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앞서 계단을 올랐던 사람들은 다시 자기의 속도대로 걸어 나가 원하는 승강 위치에서 열차를 기다린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각자의 안단테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