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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gonus 아빠토마스 May 09. 2022

프리랜서의 삶

현대 예술인의 봉건제도

요즘 “사는 집은 자가예요? 전세예요?” 같은 질문을 종종 받는데요. 이럴 때마다 중세 시대가 연상되면서 “너는 현재 계급이 주군이냐 봉신이냐?”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봉건제도란 땅을 나눠 받은 사람인 봉신이 땅의 주인인 주군에게 충성과 군사적 봉사를 바치는 계약인데요. (와, 이 제도가 지금도 남아있어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충성과 봉사를 바쳐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할지…) 이 계약으로 왕부터 귀족 그리고 기사에 이르는 계급이 강하게 유지됩니다. 당시 주군이 아무리 넓은 땅을 가졌다고 해도 전쟁에 데려갈 병력이 더 필요하다면 외부인을 돈을 주고 사서 쓰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주인에게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로운(Free) 계약에 따라 일하는 용병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말을 타고 창(Lance)을 다루는 병사가 아주 중요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프리랜서라는 말이 탄생했죠. 군사용어처럼 쓰였던 이 단어는 오늘날 ‘특정한 단체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기술과 능력으로 사업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프리랜서인가요?



저는 프리랜서 지휘자입니다. 2020년부터 저를 채용한 어느 음악대학교 덕분에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는데요. 주군이 주는 땅 대신 시간강사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신인 저는 일주일에 네 시간씩 시급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과목을 더 많이 담당할 수 없다면 여러 주군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을 위협받을 지경이니까요. 그래서 다양한 일을 맡아서 주급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지휘자, 교사, 앙상블의 부대표, 공연 대본작가처럼 모두 음악과 관련된 일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올해 계약이 끝나는 곳이 있어서 저는 또 다른 주군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저의 기술과 능력을 보고 주군이 저의 시급을 책정할 수 있는데요. 악기와 성악은 나름의 뚜렷한 음색과 특징이 있지만 지휘봉 자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군의 마음에 들고 취직하기 위해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영상이나 시연했던 공연의 포트폴리오를 보기 좋게 정리해야 합니다. 매번 다른 주군을 찾아서 그의 마음에 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준비과정이 번거롭기까지 하죠. 


반면에 중세시대 봉건사회처럼 특정단체가 아닌 한 개인이 주군이 되는 경우가 있지요. 충성과 군사적 봉사를 뺀 현대의 신봉건 제도처럼 보이는데요. 의뢰인이 음악이론, 작곡, 악기, 성악, 지휘처럼 특정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문가에게 질 높은 학습을 의탁하는 개인 레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1시간 50분 남짓한 지휘법이라는 수업은 수강생 다수가 2시간 미만을 나눠 써야 하기 때문에 적게는 15분 남짓한 시간만 지휘를 하고 다른 학생에게 차례를 넘겨야 하지요. 하지만 개인 레슨은 수업시간의 대부분을 본인을 위해 쓰이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밀도 높게 배울 수 있지요. 홀로 2시간 동안 지휘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다면 15분을 받는 경우와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군이 급여 책정을 높게 하든 낮게 하든 봉신을 향한 기대치는 그것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급여의 수준에 따라 일의 강도를 정한다는 게 예술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에 있어서는 급여의 정도를 떠나야 일하기도 편하고 주군의 기대치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하면서 주로 재미를 추구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어떤 일이든 재미가 느껴지는 부분이 꼭 한 두 개는 있거든요. 일의 시름을 잊게 하는 노래를 노동요라고 하는데 저는 평소에도 노동요가 필요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재미가 없으면 저도 노동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서양음악사에 등장하는 작곡가 중에서도 작곡을 본업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프리랜서의 삶을 살았는데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의 궁정 음악가였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 자신은 잘츠부르크의 삶이 너무 무료하고 지루했다고 해요. 잘츠부르크를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동네가 정말 작거든요. 반나절이면 중앙 시가지를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도시가 작아요. 모차르트는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면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용기 있게 프리랜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자신을 아무도 몰라보는 곳에서 음악가로 성장하기까지 스승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이름이 알려지면서 귀족 신분의 후원자도 등장하게 됩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사회에서 인정받고 귀족의 후원을 받아 음악활동을 했던 모차르트도 어찌 된 일인지 말년이 되어서는 그 후원이 뚝 끊겨버렸습니다. 가족 모두가 소일거리를 해야 할 만큼 환경이 어려워져서 모차르트는 귀족이 참석하는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얼굴도장’을 찍으면서 겨우겨우 후원을 받아내며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1833-1887)의 직업은 의사이자 화학자였습니다. 주중에는 본업에 종사했다가 주말에는 부업으로 음악공부와 작곡에 매진했는데요. 그래서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1811-1886)에게 보로딘은 “나는 일요일의 작곡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공연장에서 가끔씩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보로딘의 교향곡 2번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곡의 시작이 모든 악기가 같은 주제 선율을 연주하는데 이런 작곡기법은 작곡가의 메시지를 아주 명료하고 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로딘의 음악은 이처럼 아주 명료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아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썼지만 음악가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거나 악보를 출판하고 판매를 해야 해요.


어쩌면 보로딘은 의사, 화학자라는 본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작곡한 곡을 빚을 지면서까지 무대에 올릴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원래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에 태어난 탓도 있었고 이 때문에 본업과 부업 모두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로딘은 본업과 부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서양음악사에서 손꼽히는 본업에 충실한 행복한 프리랜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로써의 음악의 존재는 정말 소중한데요. 하지만 클래식 음악가가 음악으로써만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것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도움을 받아야만 음악인으로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전염병이 창궐하면 사람들이 모이기 어려워지고 소비가 위축되면 우리가 소위 먹고사는 일 외의 것들은 절제하게 됩니다. 스페인 독감(1918-1920)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곡가들은 하는 수 없이 악기의 편성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겨우겨우 무대에 올릴 수 있었지요. 다른 시기에 비해 편성이 축소된 실내악 작품이 더 많이 작곡되었지요. 어찌 되었든 이런 시기에는 예술이 철저하게 말라죽는 시기입니다. 



왜 예술은 재정적인 도움 없이 '사람들의 필요'로만 자생할 수 없는지 매번 한탄스럽습니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 세계를 동경하고 소비하는 사람은 분명 있지만 음악을 작품으로써, 연주로써 살려내는 사람들의 삶을 책임질 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은 앞서 보셨던 것과 같이 이미 역사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제 자신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자생력이 없는지 약한 존재인지 매번 깨닫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좋아하는 그 한 사람에게 힘을 얻습니다. 나의 연주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얻고 무대에 오르지요. 무대를 내려오면 다시 연습실과 책상 앞에서 차근차근 다음 무대를 준비합니다.  


공연장에서는 나의 연주를 기다리는 주군, 청중이 있습니다. 청중이 있기 때문에 무대 위의 나는 더 이상 프리랜서의 신분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고용인을 둔 가장 행복한 예술가로서의 2시간을 가득 불태울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주군과 봉신이 아닌 완벽히 고용된 정직원으로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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