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보기엔 시간이 없다
얼마 전, 문득 미드 '브레이킹 배드'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한때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였는데, 다시 처음부터 볼 자신이 없었다. 다 합치면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야 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요약본을 찾아봤다. 20분짜리 영상 한 편으로 전 시즌의 내용을 되짚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또 좋아했던 '덱스터' 요약본을 봤다. 역시 좋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이 드라마들을 정말 좋아했고, 과거에는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로 긴장하며 봤는데, 요약본을 보면서는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아, 이 장면이었지’ 하면서 스토리를 기억하는 정도였지, 그때의 흥분, 몰입감, 감정의 요동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다녀온 여행지를 지도에서 훑어보는 느낌이랄까. 그곳의 풍경과 분위기를 안다고 해서 여행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듯, 드라마의 스토리를 안다고 해서 같은 감정을 다시 느끼는 건 아니었다.
요즘 요약본이 너무 많은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드라마, 심지어 문학작품까지, 우리는 요약본을 통해 스토리를 빠르게 소비한다. 사람들이 요약을 선호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된다. 시간은 없고, 알아야 할 정보는 많고, 효율성이 중요한 시대니까. 하지만 스토리를 안다고 해서 그 작품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요약본이 전하는 것과 전하지 못하는 것
춘향전을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혼인한 남편이 소식이 없는데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남편이 암행어사가 되어서 나타나서 모든 걸 해결해 주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만 들으면, 춘향전이 정말 별거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춘향전의 진짜 매력은 그 단순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다. 춘향의 고집과 절개, 변학도의 비열함,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통쾌한 장면. 이런 요소들이 다 빠져버리면 춘향전을 읽는 의미가 있을까?
학창 시절에 이상하게도 시험 기간이 되면 소설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 번은 하필 『토지』를 펼쳤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1권만 맛만 보자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밤새고 말았다. 박경리 작가가 그려낸 세계 속에서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토지』의 요약본을 봤을 때, 이런 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최서희는 똑똑하고 강한 여자다...일본에 맞서 싸운다...결말은 희망적이다."
이걸 보고 황당했다. 내가 밤새 몰입했던 그 수많은 인물과 사건, 감정의 흐름은 어디 갔단 말인가? 마치 장인의 손길이 깃든 정성스러운 요리를 정제된 알약 하나로 바꿔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요약본으로도 책을 읽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감정은 시간을 요구한다
사실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만 살고 있다. 요약본이 넘쳐나는 것도 그런 흐름 때문일 것이다. 유튜브에서는 '3분 만에 영화 정리', '소설 한 권 10분 요약' 같은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 문득 이런 세상이 조금 아쉬워졌다.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감정을 깊이 느낄 기회도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닐까?
와이프는 요즘 드라마를 요약본으로 본다. 처음엔 그걸 보며 ‘이게 뭐야?’ 싶었는데, 요즘 바쁜 사람들에게는 이게 효율적인 감상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편을 다 볼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장면만 편집된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와이프가 내게 말했다.
"이 드라마 되게 재밌던데? 나중에 시간 나면 제대로 봐야겠어."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요약본을 본 것만으로는 작품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감정까지 온전히 느끼려면,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요약본이 ‘스토리를 전달하는 도구’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온전히 작품을 경험해야 한다. 드라마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고, 문학작품을 천천히 읽으며 작가가 숨겨놓은 복선을 발견하는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일 테니까.
요약본이 아닌, 경험으로 남길 것
누군가 ‘이 영화 봤어?’라고 물어봤을 때, ‘응, 요약본 봤어’라고 답하는 건 조금 이상할 것 같다. 작품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하고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