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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Mar 01. 2024

엄마를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귀찮아하지 말 것

지혜롭고 또 순진무구했던 나의 엄마

나는 지금 북적거리는 카페에 홀로 앉아있다. 월요일 오후 1시, 카페는 중장년의 여성들로 꽉꽉 들어차있다. 그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때론 진지하게 때론 박장대소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여지없이 그들에게서 내 엄마를 본다. 저 중 한 무리에 섞여 앉아 너무 웃긴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젖힌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웃어대던 나의 엄마를 쉽게 그려낸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내가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다시 그쪽을 바라봤을 땐 엄마가 그곳에 분명히 앉아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일은 있을 수 없고 서 더욱 고집스럽게 모니터만 바라본다.

그저 그렇게 어딘가에 존재하겠, 내 주변에 바람처럼 향기처럼 흐르고 있겠 믿는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길에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모녀와 맞닥뜨렸다. 엄마가 남자화장실로 들어가려 하자 딸은 본인의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실수를 했다는 듯 깔깔대며 '엄마, 거기 남자화장실이야.'하고 엄마의 팔을 잡아 끈다. 모녀는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화장실로 사라진다.


조금 전 나는 그들이 들어간 여자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물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몰라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벽에 물 내림 버튼이 달려있는 걸 보고 눌러 물을 내렸다.

요즘 공중화장실은 변기물 내리는 방법이 아주 제각각이다. 노인들에겐 모든 게 점점 어렵게 느껴질 것 같다.

키오스크, 배달음식 주문하기, 변기 물 내리기까지 숨 쉬듯 당연하게 해낼 수 있던 일들이 노인들에겐 점점 깨부숴야 할 난관이 되어가고 있다.

엄마가 살아있었으면 매번 나한테 전화를 해서 피자를 배달시켜 달라, 택시를 잡아달라, 화장실 변기에 왜 레버가 없는 것이냐 물어댔겠지.

살아만 있어 줬으면 귀찮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내가 다 해줬을 텐데. 그냥 살아만 있었으면.


좀 전의 그 모녀처럼 엄마가 하는 사소한 실수에도 엄마 팔을 잡아끌며 박장대소를 했을 텐데.

가끔은 심한 기계치인 엄마가 걱정 돼 숙제를 못 마친 어린아이를 대하듯 내 앞에 앉혀놓고 가르치려 애도 써봤을 테지.

늘 그렇듯이 엄마는 그다음 날이면 '나 못하겠어. 해 줘.'하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겠지만.


엄마는 핸드폰으로 계산기어플 하나 켤 줄 몰랐다. 동네아줌마들과 계를 하고 있던 엄마는 월말이 되면 전화를 걸어서

"유호야, 이번달 금값은 ㅇㅇ원이야. 이것 좀 17명으로 나눠서 이모들한테 단톡으로 보내줘." 했다.

몇 번 가르치다 두 손 들고 포기했다. 인터넷 뱅킹도, 홈쇼핑 주문도, 저녁 하기 싫은 날의 저녁밥 주문도 그냥 내가 다 해줬다.

엄마는 능력이 없다기보단 의지가 없어 보였다. 내가 있으니까.

나는 인상 한 번 찌푸린 적 없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엄마가 아프고 난 뒤부터는 부탁하기 전에 알아서 미리미리 부탁할 법한 것들을 해놓기도 했다.

귀찮지 않았다. 도움이 될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내가 유독 착해서라기보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던 엄마의 행복에 대한 부채감이 언제나 나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혹시나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쩌지? 엄마가 본인이 살아온 인생이 별로라고 느끼면 어쩌지? 우리 엄마는 행복해야만 하는 사람인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데.' 나는 자주 부담스러워했고 대체로 내가 해결해 주려 애를 썼다.

나는 스스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하여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은 얼른 받아 치워 버리고 엄마가 즐거워할 법한 이야기, 예를 들면 내 남편의 월급인상이라거나 형부의 승진, 언니의 성과급, 다른 집 아들의 불효를 들먹이며 우리 집 아들은 엄마에게 얼마나 자상한지 등을 왕 옆에서 아부하는 간신처럼 쏟아냈다.

그러면 엄마는 '맞아. 난 참 자식 복이 많은 사람이야.' 하고 만족하는 얼굴을 했고 그제야 나는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엄마보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진 것이.

지금 나의 아이들처럼 세상 모든 궁금증을 엄마가 해결해 줄 듯이 "엄마 이건 뭐야? 엄마 이건 왜 그런 거야?"

엄마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물었었는데.

엄마는 대체로 친절히 대답해 주었지만 때로는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다.

"유호야. 그건 이따 아빠한테 물어보자."


엄마는 배움이 짧았다.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한 번은 언니랑 마음먹고 엄마를 검정고시 학원에 보내주려고 했었는데 엄마가 극구 사양했다.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고 괜히 돈만 아깝다 했다.

엄마가 좁은 세상만 알고 사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중고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삶의 지혜를 이미 모두 깨닫고 있었다.

엄마에게 졸업장 같은 건 정말 필요도 의미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체했을 땐 직접 담근 매실액을 먹이고 손과 발을 따주었고 피부병이 생겼을 때는 병원에서도 해결이 안 되자 약초를 구해 몸을 담그게 했다. 건조한 겨울밤이면 가려움에 매일 밤 잠을 설치고 벅벅 긁어댔는데 엄마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그때마다 같이 일어나서 내 몸을 살살 긁어주고 흉터가 나지 않게 내 손톱을 바짝 깎아 주었다. 인터넷 뱅킹은 할 줄 모르지만 공과금 고지서를 소중히 들고 은행에 가서 밀리지 않고 납부했다. 내 기억 속에 열 곳에 가까운 집이 있으니 엄마는 살며 수 십 번의 이사를 했을 텐데 언제나 무리 없이 계약했고 부동산과 복비를 흥정했고 여름엔 덜 덥게 겨울엔 덜 춥게 집을 관리했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주고 겨울엔 이불을 뜯어 안에 솜을 넣고 다시 바느질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큰 상처 없이 우리 삼 남매를 키워냈다. 본인은 큰 병에 걸렸으나 우리에게 모나고 못난 모습 보이지 않고 곱게 이 세상과 작별했다.


엄마에게 정말 졸업장 따위가 필요했을까?




교육받지 못했으므로 교육하는 법을 몰라 엄마는 우리를 방목했다. 우리가 요구할 때까지 학원도 보내지 않았고 공부하라고 닦달도 하지 않았다.

좋은 점수를 받으면 칭찬해 주었지만 못한다고 썩 구박하지도 않았다. 무슨 과목에 흥미가 있냐느니 장래희망이 뭐냐느니 하는 질문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림을 잘 그려 전국대회에서도 상을 받고 춤을 잘 춰서 3년 동안이나 운동회마다 구령대에 시범단으로 올라 학생들 대표로 춤을 추었다. 머리 좋아서 한 번은 선생님이 엄마를 불러 '유호는 정말 똑똑하다. 한 학년을 월반해도 될 정도다. 꼭 신경 써서 공부를 시켜줘야 한다.'라고 면담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약간은 자랑스럽고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며 그저 그런 순간들을 버텨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엄마는 언제나처럼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의 반짝이던 재능들은 서서히 빛이 꺼져서 결국 아무 재능 없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요즘 세상은 이런 걸 아주 잘못된 육아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먹을 만큼 나이를 먹은 나는 우리 엄마가 엄마가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육아했음을 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성실히 일했다. 늘 우리를 깨끗이 박박 씻겼고 곱고 예쁜 색의 옷을 입혔다. 사뭇 진지하게 미간에 인상을 쓰며 정교하게 우리의 머리를 빗기고 땋아줬다. 손톱 발톱이 길고 때가 끼는 것이 꼴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처럼 유난을 떨었다.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 먹였고 엄마는 찬밥을 먹었다. 생선을 잔가시 하나 없이 발라 우리들의 밥 위에 올려준 뒤 가시를 손에 들고 남은 살을 뜯어먹었다.


파 한 단이라도 싸게 사려 먼 시장까지 걸어 다니는 짠순이였지만 유치원생인 우리가 추석 때 달님에게 피아노를 선물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땐 피아노가 생겼다.

엄마는 전원 버튼 하나 누를 줄 몰랐지만 다른 엄마들보다 재빠르게 우리에게 컴퓨터를 사줬다.

유행하는 옷도 사줬고 멋쟁이 파마도 해주었다. 어린이날엔 놀이동산에 데려가줬고 소풍날엔 새벽 6시부터 고소한 김밥냄새에 눈을 뜨게 해 줬다.


그 이상의 육아라는 건 엄마의 상상력의 범위에 있지 않았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 삼 남매는 휘황찬란한 사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엄마의 사랑과 희생과 믿음을 받아먹고 때론 휘청거릴지언정 비뚤어지지 않게 자랐다.

흔들리던 순간, 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절망의 길목 끝에서 엄마가 후레쉬를 켜들고 찬바람을 맞으면서 언제까지나 미련스럽게 날 기다리고 서있을 것 같은 상상이 늘 뭉근하게 들었기 때문에 나쁜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엄마가 우리를 키워내는 방법이었다.




나는 분명 우리 아이들을 사교육의 늪에 떠밀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엄마의 육아를 배우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엄마가 살아있었더라면 우리는 서로 지혜를 주고받으며 성장해 나갔을 텐데.

엄마는 나에게 스마트폰 쓰는 법과 키오스크 누르는 법을 배우고 나는 엄마에게 사춘기 아이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과 아이들 옷에 묻은 얼룩을 깨끗이 지우는 법을 배웠을 텐데. (과탄산 소다와 식초로도 왜 안 지워지는 것인가. 대체 왜!!)


오늘따라 수많은 '~텐데.' 때문에 마음이 쓸쓸하다. 창 밖에는 몇 시간째 눈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날에 엄마는 소금을 뿌렸던가, 걸레로 복도를 닦았던가. 어린 우리가 감기에 걸릴까 봐 집 안에 가두었던가, 아니면 꽁꽁 싸매고 눈 위를 구르게 했던가.

오늘도 나의 엄마가 궁금하고 그립다.


엄마가 피곤한 나에게 매번 같은 질문을 하고 아빠가 일에 치여 바쁜 나에게 자꾸 뭘 시켜서 귀찮아도 웬만하면 참을성 있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 역시 그렇게 부모를 귀찮게 하며 자랐고 둘째로 그 귀찮음이 언제 갑자기 끝나버려 아쉬워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애를 키워보니 애들은 같은 말을 수 천, 수 만 번 반복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반복해 주어도 다음 날이면 세상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듯 같은 실수를 한다.

'우리 애가 좀.. 모자란가?' 하는 의문이 들 때쯤 미세하게 한 뼘 자라는 듯하다.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할 뿐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인내심을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도와드리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다시 엄마 때문에 귀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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