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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Feb 27. 2024

엄마의 장래희망은 할머니

나의 엄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선물과 용돈에도 불구하고 내가 엄마에게 건네주었을 때 엄마가 가장 행복해했던 것(?) 바로 손녀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엄마아빠한테 효도하라고 애를 낳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손주 봐주기 싫어서 자녀가 아이 낳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조부모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이십 대 때부터 유모차에 아이를 태밀고 다니는 할머니들을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곤 했다.

'나는 언제 할머니가 될까?'

종종 그런 얘기를 했다.


지금 내 남편은 우리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다. 당시 우리는 1년도 채 연애하지 않았고 남편 주변에 결혼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기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더욱이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러던 어느 날 우리 엄마가 덜컥 암에 걸려버렸다. 나는 병원에서 주저앉아 울다가 남자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암이래. 나는 이제 어떡하지? 엄마는 어떡하지? 엄마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나를 달래며 세 살이나 어린 내 남자친구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어. 일단은 결혼을 하자. 어머님 옆에 신혼집을 얻자. 가까운 곳에서 지내면 어머님이 아프실 때 바로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1년쯤 신혼생활을 하고 아기를 낳자. 우린 어차피 둘 다 아기를 갖고 싶어 했잖아. 어머님이 건강하게 살고 싶어질 삶의 동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드리자. 괜찮을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


충격에 빠진 나를 달래려 한 말이 그 노력이 가상하고 고마워 큰 위로가 됐다...

고 생각하기 무섭게 우리는 곧 서로의 가족에게 결혼상대 인사를 드렸다. 엄마가 조혈모세포이식 수술을 하고 약간의 회복을 마치자 바로 상견례를 진행했다. 엄마는 빡빡 민 머리가 발이 되기도 전에 가발에 을 잔뜩 넣은 드라이를 하고 내 결혼식의 화촉점화를 했다.

그리곤 정말로 엄마 집에서 1분 거리에 신혼집을 얻었다.


내가 너무 내 남편의 실행력을 우습게 봤다. 사업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웃 얼굴로 '안 하겠다.' 달래 놓고는 집 나가서 몰래 사업을 시작한 사람인데 내가 왜 그 프러포즈를 위로로만 들었을까?

그 후에 정식으로 멋들어진 프러포즈를 해주었지만 나에겐 여전히 엄마가 암선고를 받은 그날, 위로처럼 보고서처럼 담백하게 제안했던 그 결혼이 프러포즈다. 아직도 가끔 대판 싸워 화가 치민 날에도 그 생각을 하면 음이 녹고 만다. 




이변 없10개월의 신혼과 10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축복 같은 첫아이 은유를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하 조리원으로 옮기는 차 안에서 엄마는 손주를 처음 품에 안았다. 엄마가 늘 기다리고 상상해 온 순간답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세상을 안은 듯 위풍당당해 보였고 금은보화를 쌓아둔 부자처럼 여유 있어 보였다.

병원에서 조리원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20분이었지만 그저 조용히 잠만 자 아기가 할머니를 사로잡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리원에서 퇴소하고 집에 오자마자 본격적인 엄마의 육아가 시작됐다. 수술하고 1년 반이 훌쩍 지난 시점이라 엄마의 건강이 거의 회복된 시기였다. 살이 적당히 올라 혈색이 좋고 움직임도 가벼웠다. 돌아보니 엄마가 암에 걸린 이후 아주 건강했던 짧은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아주 오래 그런 시기가 지속될 거라 착각했지만 말이다.

엄마는 손녀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결국 할머니가 되는 기쁨을 누리려 그처럼 고되고 지난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수치가 좋아졌다, 경과가 너무 좋다는 칭찬에 가까운 결과를 들었다. 엄마는 좋은 성적표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럽고도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 아기 덕분이에요. 제 손주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져서 그런가 봐요."

바쁜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짧은 시간밖에 내어주지 못했지만 만약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관심도 없을 남의 손주 자랑을 오랜 시간 들어야 했을지도 모르니 선생님께는 다행인 일이다.


엄마의 하루는 아기를 보러 오거나, 아기를 보지 않을 때는 아기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는 것으로 가득 찼다. 거북이에게 등껍질이 있는 게 당연하듯이 늘 엄마 등딱지에 내 아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다녔다. 못내 자랑하고 싶은지 아기를 매달고 괜스레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누구라도 엄마에게 '등딱지에 그거 손주예요?' 물어봐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엄마 은유가 그렇게 좋아? 우리 삼 남매보다 더 좋아?"

어느 날 내가 묻자 엄마는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은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주 약간의 섭섭함은 세상에 내 아이를 나만큼 사랑해 주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락함과 안도감으로 가볍게 누를 수 있었다. 엄마는 완벽한 할머니가 되었다. 35년 전 완벽한 엄마가 되었던 것처럼.




은유의 돌잔치 때 엄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무릎 통증이 심해져 줄기세포 치료를 해서 회복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 그냥 은유 돌잔치에 가지 말까 봐."

"왜??"

"외할머니가 이렇게 다리를 절면 좀 그렇잖아.. 사돈분들 보기도 부끄럽고."

"그런 게 어딨어 엄마. 엄마가 은유 다 키워줬는데. 우리 시댁 식구들 그런 분들 아닌 거 알잖아. 엄마 안 오면 나 그냥 돌잔치 안 할래."


내 으름장에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목발을 짚고 등장했었다.

돌잔치 중 사회자가 엄마의 불편한 다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외할머니!! 앞으로 나오셔서 손녀딸에게 명주실을 목에 걸어주세요!"

했을 때 엄마는 잠시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다리를 절뚝이지 않으려 온 발에 힘을 싣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애써 웃으며 걸었다. 그 씩씩한 모습에 내 마음은 얼마나 일그러졌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진 속 손녀에게 명주실을 걸고 있는 엄마와 내 딸은 마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다.


저 명주실을 엄마 목에 걸어줬으면 엄마는 좀 더 살았을까?

이제와 괜한 상상을 해본다.




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무려 9년이나 딩크족을 유지해 왔던 언니 역시 임신 중이었다. 엄마에게 질세라 언니조차 완벽한 이모가 되어 내 딸을 열렬하게 사랑하다 못해 이제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겠다는 결심을 드디어 굳힌 것이다.

엄마는 갑자기 두 명의 손주를 더 보게 생겼다. 엄마는 물론 기뻐했지만 간간히 걱정스러워 보였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감자(언니아기)랑 호두(내 둘째)가 은유만큼 예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은유만큼 다른 아기를 예뻐할 수 있을까 걱정 돼. 그럼 감자랑 호두가 서운할 거 아냐."

뭘 그런 걱정을 하냐며 놀리고 웃었지만 엄마는 제법 심각했다. 엄마는 암만 생각해도 혼자서는 그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하루는 아빠한테까지 상담을 하고는 황당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 내가 네 아빠한테 '감자랑 호두가 나한테 은유만큼 예쁘지 않으면 어떡하지?' 물어봤더니 '못생겼어도 어떡해 손주니까 예뻐해야지.' 이러고 있어. 누가 얼굴 말했어? 사랑하는 걸 얘기한 거지. 암튼 니 아빤 말이 안 통해."


큭큭대고 웃으면서 '뭘 미리 그런 걱정을 하고 있어. 그냥 낳고 생각해. 낳았는데도 안 이쁘면 뭐 어쩔 수 없지.' 대꾸했지만 엄마는 그게 꽤나 걱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두와 감자가 10일 간격으로 줄줄이 태어나자 엄마는 은유를 사랑했던 것처럼 그 아이들을 자연스레 품었다. 엄마의 사랑이 삼등분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랑 바구니가 세 배로 커진 것이다.

언니와 나와 동생을 똑같이 사랑해 주었던 것처럼 두 여자아이와 한 남자아이를 온 마음 다해 골고루 사랑해 주었다.

마치 데자뷔처럼.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가 죽던 그날까지.

평생 타인을 넘치듯 사랑하다 파도같이 떠났다.




태어나서부터 엄마가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엄마를 봐왔다. 단호하게 말할 있다. 시절 엄마가 가장 행복해 보이던 시기는 내가 첫아이를 낳고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손주가 생겨 젖내 나는 아이들 품에 둘러싸여 있던 4년의 시간라고.

어떤 왕도 백만장자도 엄마보다 마음이 부자일 수는 없었다.


엄마가 죽기 직전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간호사 선생님께 부탁해 엄마의 병실에 스피커를 하나 놓았다. 엄마와 아기들이 놀던 소리들을 담은 것이다. 은유와 엄마가 하나 둘 셋 숫자를 읽는 소리, 둘이 마주 보고 깔깔 대고 웃는 소리, 둘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소리, 엄마의 까꿍 소리에 둘째 은호가 자지러지는 소리.


나는 의식을 잃은 엄마가 어둠 속에 갇혀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행복했던 시절의 소리들을 따라 걸으면 어둠을 뒤로하고 빛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의식을 잃어본 적이 없으니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어디에 서있게 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은.. 엄마가 정말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라면 엄마의 걸음이 외롭지 않게 아이들의 목소리가 같이 걸어줬으면 했다.

사람이 죽을 때 제일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감각은 청각. 중환자실에서 엄마는 분명 아이들의 소리에 둘러 쌓여 얼굴은 웃지 못해도 마음은 웃었을 것이다. 아니 두고 가는 손주들이 걸려 마음으로 울었을까?

어찌 됐건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낳은 아기로 엄마가 엄청나게 행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를 얼떨결에 해 버렸다. 엄마가 죽고 나서야 아기를 낳았으면 후회로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 예쁜 짓을 하면 깔깔 웃다가도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든다.

'엄마가 이걸 봤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숨 넘어가게 웃을 엄마가 훤히 그려져서 슬프고 서럽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동영상을 엄마한테 보내려다가 멈칫하곤 했다. 이젠 그런 순간들도 점점 줄어든다. 이제야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나 보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엄마아빠의 행복을 위해서 아기를 낳으세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각자 다른 사정과 환경을 가졌을 사람들인데 하나의 방법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본인의 부모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되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지 궁금해해보자.

그걸 안다고 해서 어차피 내가 다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하는 거고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내 도움이랑은 하등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고 있었고 마침 운 좋게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행복해할지는 예상 못했지만.

나는 한평생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과제였던 사람인지라 4년 동안 동화 속 주인공처럼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며 만족감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할머니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던 한 여자는 세 명의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세 명의 아이를 낳아서 결국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으며 먼 길을 떠났답니다.

오늘의 동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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