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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y 08. 2024

또 다른 맏이와 마주침

미운털이 배기기 시작

 가부장적 아버지와 동네에서 소문난 사납쟁이 홀시어머니를 모신 내 어머닌 참 순한 분이셨다. 살아오시면서 삶의 풍랑을 많이 맞으시고 ‘여자의 일생’ 노래 가사처럼 역경에 꼬이셨다. 할머니는 괜한 생트집으로 어린 손주들을 밥상머리에서 밥 수저로 때리고 엄마한테 화질을 해대셨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엄마가 자식들 대신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비는데 우린 철이 없어서 무서워 달아나기 바빴다.

소풍 등 학교행사에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오시고 이런 특별한 날엔 새 옷을 미리 사주셨는데 이뻐서 내 맘에도 든 건 잽싸게 잡은 둘째 동생한테 먼저 뺏긴 건지 내주게 된 건지 암튼 그랬다.


 엄마의 남편인 아버지는 남의 편이고 역시 할머니와 한 편이 되어서 엄마는 무지 속을 썩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맏이인 나와 내 밑으로 세 동생이 개성이 강하고 고만고만하게 자라났다.

 오빠들이 많은 친구는 오빠가 무섭다 하고 나는 인상파 아버지가 아닌 엄마가 무서워서 영면하시는 그날까지 호랑이로 저장하고서 적어도 하루 두 번씩은 세상 소식도 들을 겸 안부 전화를 했었다. 그러면서 엄마의 아파가는 속도와 오늘은 가시겠구나까지 가늠했다.

 남편이 퇴직금으로 사업에 손대기 전까지 그러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작은 아이가 입덧의 고통을 줄 때까지는 내가 지갑에 항상 여유 지폐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사업을 한답시고 고정 생활비를 내놓지 않은 남편이 술고래가 되어서 오는 날이 많았다. 난 그의 지갑에서 몇 만 원씩을 날마다 끄집어냈다. 안 그러면 돈을 못 만지는데 남편은 술값으로 다 나갔나 보다 하는지 돈 정리를 안 하고 다녀서 인지 배가 불러와서 오늘내일할 때까지도 모르더라.

 남동생은 군대 제대 후 돈이 제법 드는 디자인을 하겠다고 나서서 엄마는 “집 한 채 나가게 생겼다.”라며 걱정을 하셨다. 그뿐이 아니라, 입덧이 심해서 속을 가라앉히려고 누운 내게 지갑을 열게 했다. 금방 당장 필요하다 해서 몇 십만 원을 있는 대로 꺼내주기도 했으며, 또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내게 오셔서 몇 만 원씩을 받아다 아들 뒷바라지에 보태셨다. 바람이 살살 부는데 엄마의 머리를 두른 마후라 속에서 벙글벙글 아주 좋아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그런데 막상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내밂 하려고 하는데 이때부터 남편이 이 일을 접고 다른 일도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거다. 사장이란 타이틀이 뭐였는지 농땡이 치기 시작했다. 취직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거다. 그러면서 청년 시절에 부모를 여읜 막둥이 남편은 5형제 속에 조카 셋까지 과하게 챙겼다.


 큰아이 때처럼 미역국을 국대접으로 크게 받고 따신 엄마집 방에 몸을 풀러 갔다. 그러나 그때와는 완전 딴판 아닌가. 난 몸조리해 주시는 엄마한테 땡전 한 푼 없이 아기 포대기만 안고 들어와 앉은 거다. 이때 이종사촌도 아기를 낳았는데 이십오만 원을 이모 손에 쥐여줬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서운 눈빛을 보았다. 소 잡뼈를 넣고 끓여 주신 미역국은 니글니글 거려서 “엄마, 나 소고기를 조금 넣거나 다시다와 간장만 넣고 끓인 시원한 미역국이 먹고 싶어.” “뭐? 배부른 소리 하네. 네가 돈 있어?” 그날부터 난 밥을 먹은 척 맨 밥을 한 그릇 뜨는 둥 비우는 둥 했다. 그리고 매일을 눈물로 삼칠일까지 적셨다. 엄마 돈으로 산 분유를 새벽에 탈 때면 겨울 내의에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으스스 한기가 느껴져서 오들오들 이빨이 부딪쳤다. 보일러를 켤래면 안방 문을 슬쩍 열어야 했는데 여덟 살 아래 막내 여동생한테 걸려서 “더운데 왜 틀어. 가스비 나와.” 난 이후로 미역국도 따신 방에도 못 누워 봤다. 몸조리 산후조리는 땀 흘려가며 잘해야 됨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난 이미 이때 돈이 없어서 안 된 것이다.

 산후 우울증 같다. 나는 노상 울었다.

그래서 아기에게 신경과민증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초유부터 모유를 한 방울도 먹이지 않았다. 난 큰 잘못을 하기 시작했다. 굶으니 헛헛해서 빵이 댕겼다. “엄마, 나 빵이 먹고 싶어.” “뭐, 너 돈 있어? 어디서 그래.” 엄마한테는 흰 자가 확 몰려 있었다. 이때부터 난 판피린 병의 작은 글씨를 못 읽었다.

 결국 삼칠일이 지나서 남편한테 아기들 잘 보살피라는 쪽지를 써놓고서 청양에 사는 사회 친구 집으로 도주를 했다. 퉁퉁 붓는 젖가슴을 광목 긴 기저귀로 칭칭 싸매고선 일주일을 받아준 친구네서 아기가 눈에 밟혀 버티기가 무너졌다. 집으로 온 후 남편은 기술이 있어서 취직이 되고 나도 당장 식당으로 돈을 벌러 다녔다. 몸조리 값도 드려야 하고 이제부터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으리라. 그런 것이 지금까지도 일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일로 덜 풀린 속이 아직 고름으로  있어. 곪은 건 터져야 개운하지.

아핫! 글에 쓰면 터지고 그곳에 새살이 돋아져.

아마도 이때부터 형제 우애가 확연히 더 변질된 게 아닐런지? 내 속에 유적지처럼 자리하니 이정표를 세워주면 되잖아.

말이 쉽지.

한 수저의 밥이 내 체력으로 흡수되면 양보로 새김질되는 거였어.

내 어깨에 맏이의 힘을 공기 주입기로 슉슉 밀어주면 될 건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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