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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y 15. 2024

또 다른 맏이와 마주침

다섯 손가락 깨물면 다 아파

 가출하고 돌아온 길은 바로 길병원 병실이다. 내 아긴 유니세프 후원 봉사 방송의 어린아이처럼, 난 성냥팔이 소녀같이 마주 보는데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가 머리부터 발목까지 주삿바늘이 꽂아 있고 초록 멍투성이었다. 미칠 듯이 소리 지르고 싶었다. 영양실조 아길 실험대상에 올린 건 아닌지? 어쨌건 씻어지지 못할 내 과오다. 지금도 그 순간은 아찔해서 어지럼이 일어난다.


 눈만 휘둥그레했던 아기가 일주일 되니 원기회복되어서 난 엄마한테 아기의 보살핌을 맡기고 제정신도 아닌 체 식당 써빙일로 취직을 했다. 남편도 금형 반도체 기술이 있어서 취직을 하고 이제 검정봉다리 든 이들이 부럽지 않게 됐다.


 남편과 나는 직업을 가지게 됐으니 내게 돈이 들어오기 시작된 거. 남편이 부모도 아닌 형제 넘어 조카에게까지 물적 베풂을 하는데 열이 받았다. 하지 말라고 막으면 안 하겠는가. 쌈이 될 확률만 높지. 에라, 나도 돈을 버는데 나도 친정이 있는데. 이러다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부부가 서로 눈치는 챘어도 몰래몰래 푸는 것이 보이지 않겠는가. 시장을 본 검정 봉지 든 이들이 마냥 부러웠던 내가 돈을 버니 맘까지 같이 열었다. 내주게 된 것이 아주 큰 것을 주지 않으면 푼푼이 나가는 것은 표시가 안 나더라. 내 가정이 있으면서 짬짬이 내주는 건 표시가 없이 되려 억울한 소리로 진상되어 돌아왔다. 푼돈이 한 달이면 묵직한 건데……


 여기다가 무서워지기 시작한 내 어머닌 특히나 동생들 앞에서 엄한 소리를 하시고, 맏이인 내게 타박타박하셨다.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픈 건데 내리사랑 이어서인가 “싹수가 없냐. 네 아비만 아냐.” 알아듣지 못하게 흘기신 눈으로 큰 소리를 내셨다. 아프기 시작하려고 정 떼려고 하시려나 별생각을 다 가졌다. 아버진 동네 교회서 점심값 2만 원씩을 가져오면 관광차 타고 지방으로 바람 쐬러 간다는 말에 솔깃하고 가셨다. 그리고선 다단계처럼 1회용 팩으로 된 타먹는 인삼가루를 2박스씩이나 사 오셨다. 이게 육십만 원. 돈을 잘 쓰지도 못하는 아버지인데 사 오시고선 벌벌 떨며 엄마를 닥달구지 하셨다. 결국 나는 엄마가 편해야 하니 육십만 원을 물어주고 한 박스는 가져다 마셨다. 별다른 효과는 모르겠더라.



 꽃이 피면 그 밑에 돌멩이도 이쁜 봄이다. 연두색으로 도두라진 야들야들한 계절.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의 나들이를 또 가시고선 모시떡을 두 박스나 사 오셨다. 후회하시며 엄마를 또 쪼았다. 내가 떡 값을 내드렸다. 돈 나가는 것에 예민하신 아버진 남들 집에 다 있는 전화기도 내가 첫 취직해서 번 돈으로 전화를 놓게 했다. 이것도 맏이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의 맞음이란가.


 “하수가가 망가졌어. 세탁기가 고장 났어.” 엄마가 안 계신 지금도 나는 이런 연락을 받으면 요기조기 알아보고 연락처를 두세 개 넘겨준다. 그런데 화근이다. “이 사람이 잘못 고쳤어!” 나는 내 업무도 많고 한데 맏이의 자리를 특히 치르고 있다.


 엄마 집 가까운 곳에 둘째 딸이 살며 낮잠 자고 있어도, 부모님이 아프면 일가방 맨 체로 허겁지겁 달려와서 병원을 모시고 다녔다. 다 내 몫이다. 저녁에 다시 와서 죽을 해드리고 물수건 바꿔드리며 주물러 드렸다. 시간이 금세 자정을 넘어가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에, 내 피곤한 몸도 녹여줘야 할 집에 가야 하니 일어서면 “으유, 딸은 필요 없어. 아들이 최고야. 아들은 계속 옆에서 밤새 있어주는데.” 철러덩 철퍼덩 맥컬이 없는 다리가 풀리면서 ‘후우’ 속으로 한숨만 가졌다. 동생들은 와보지도 않는데…… 난 일가방 맨 체로 달려든 건데……


 어느 결혼식장에서 딸이 넷 되는 아버지의 축사는 이랬다.

“난 오늘 이후로 맏사위 될 자네한테 나의 힘을 실어줄 거네. 자네는 맏이의 힘을 거머쥐고서 내 세 딸도 잘 지켜주기 바라네.”

가끔씩 생각나는 이 장면.

나도 내 맏사위한테 '큰!'이란 힘을 밀어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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