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덩이를 잘라서 왜 딸부터 줘. 아들 먼저 줘야 하는데 딸부터 주는 게 이상하더라. 그러니 딸이 먼저 죽지.” 엄마가 내게 기를 죽이시네.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엄마랑 둘이서 보는데 엄마가 단박에 하신 말씀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며 정신없이 보았던 거. 엄마는 이때도 “너는 내게 죄지은 게 많아. 네가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죄를 졌나 보다. 가장 많이 운다.” 한 말씀하셨다. 나는 뭉치 휴지가 짤 정도로 울었다. 서러움이 북받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손까지 끈끈하게 적신 나는 속으로 ‘내 아이들한테 음해한 소리를 죽을 때까진 하지 말아야지. 거친 말로 실수하지 않을 거야.’ 이런 다짐을 꾹꾹 눌렀다.
집안에 아기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나와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유진이는 큰 이모인 나의 사랑도 보살핌의 손을 타게 했다. 내 씀씀이로 따뜻하게 보듬고 꽃 원피스로 날개를 달아 주었지.
이 조카가 대학 입학 후 바로 시집을 가겠다고 하는데 아르바이트비 두 달 치만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통장 잔고 5백만 원을 다 털고 남은 생활비에서 마늘과 깨소금, 참기름 등 양념들도 같이 챙겨 줬었다.
친엄마 같던 그 융숭함을 뒤로하고 이 아이가 결혼하면서 연락이 멀리 뜸해졌다. 그러다가 조카사위가 우리 회사의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나는 다른 새 어른이 되었다. 유진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고 하니 기특하고 이쁨이 다가와서 책가방을 사주라고 오만 원권 4장을 조카집에 들려서 줬다. 이틀 후에 “아기들이 보고 싶구나!” 통화를 하니 유진이가 “나 할 얘기가 있어. 이제 전화하지 마. 알겠지? 이게 마지막이다. 절대 하면 안 돼. 이제 끝이야.” “그래. 알겠어.” 직격탄을 맞은 나는 “갑자기 왜 그러냐?”라는 반문도 하지 않았다. 유진이도 지 엄마처럼 내게 짜증 난 목소리로 차갑게 냉정한 의절을 했다.
솜털이 거꾸로 곤두섰다. 혓바닥에 총알을 맞은 느낌이다.
이모란 매력이 없어져서일까? 어이가 없이 안부 전화에 허당인 나는 많이 밑으로 내리 꽂혀 보였나. 받는 사랑이 넘쳐난 건가. 큰 이모란 자격에 크로스를 매겼다. 의외의 상황이 내게 상처를 꼬아댔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삭혀야 했다.
잘 살아 주고 있구나! 얘들 풀이 웃자라니 길을 감추는구나.
시계는 거꾸로 돌고 동그라미는 원래 각이 서 있나 보군. 허 참 놔!!!
(어느 기사에서 눈으로 밑줄 그어논 부분)
옛날 인디언들은 삼각형 모양을 양심에 품고 있다고 했다. 부끄러운 거짓이 되는 것에 마음이 쿡쿡 찔리니 원이 되고 이 동그란 원은 빙글빙글 돌다가 무뎌져서 더 이상 양심을 못 느끼게 되더라고. 내 카톡 상태 메세지에서 찾아냄.
작년에 이맘때 TV 방송 ‘아침마당’에 두 자매가 나왔다. 미혼인 언니는 54세인데 동생이 셋이며 같이 방송에 나온 바로 밑의 동생은 3급의 지적 장애가 있었다.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내주며 “언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보세요.” 이 동생이 언니 팔을 바로 잡더니 “언니, 나 말해도 돼?” 언니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우리 언니가 있어서 좋아요. 언니도 나 좋지? 사이좋게 지내자. 나, 언니 말 잘 들을 거야.” 다 큰 아가씨인데 이렇게 나를 감격스럽게 해줬다. 이 뜨거운 말을, 뭉클한 자매 이야기를 둘째 동생도 봤더라면……
엄마의 울타리가 없어진 지금. 둘째네랑 나의 왕래를 엄마가 막아 놓으셨을 것 같다. 나 가슴 좀 펴고 살라고.
난 또 하나의 틱이 생겼다. ‘용서, 용서, 용서!’ 읊어대기 시작했다. ‘엄마 집에 고기.’
처럼 저절로 입에서 쭈물쭈물 거린다. 날이 구지려면 더 되뇌어지는 말.
저려진 아픔이 몰려들면 진이 빠지고 가슴 통증이 생길까 봐서 스스로 길을 가다가 터득이 됐다. ‘용서, 용서, 용서!’ 내 걸 묻히고 살아가야 하는 방법.
내가 사무실을 열고 남동생과 막냇동생에게 안부의 카톡을 자주 주었다. 얘들과 소통이 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두 동생이 이따금이라도 연락을 주고 좋은 말들을 주니 내가 얼굴이 펴졌다. 고된 작업이었던 공항 일도 접었으니 “얼굴이 좋아졌어요.” 말을 주위에서 한다. 둘째네도 출가한 자식들과 이쁘게 자라는 손주들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잘 살을 것이다. 지나간 생각을 접고 있다.
처음 사무실을 여니 막냇동생이 3십만 원을 봉투에 담아왔다. 싫다고 뿌리치는데 "언니도 나 챙겨주잖아." 그래서 고맙다 하고 받아뒀다. 그런데 금세 탁자의 믹스커피를 덥적 들었네.
이런데 없다고. 커피 마시게 하는데 못 봤다나.
“막내야! 이러면 안 돼. 왜 그래? 여긴 내 의도대로 해.” 손에 쥔 것을 도로 놓게 했다.
이번엔 탕비실에 가더니 저번에 내게 준 도라지청을 지 가방에 도로 넣더라. (습관처럼) 뭐든지 막내가 주는 건 잽싸게 뜯어서 먹든가 헐어서 써야 한다. 그 성미란 여전하다.
아직도 미혼인 두 동생과 가끔 밥을 같이 먹고, 부스럭부스럭 비스킷도 뜯어먹고 그러면서
“아니, 아니.”소리도 해본다. “아니오!”소리. NO!라고 말해 보는 거다.
가이드 받은 따스한 햇볕처럼 그럭저럭 우애가 이렇게 넘어가는 것일 테다.
내겐 호랑이여도 같이 손잡고 다니던 엄마. 살아계셨다면 지금 내 사무실도 꽤 오시고 곱게 치장하고 앉아 계실 텐데. 집 갈 땐 시장도 같이 보고…… 엄마랑 같이 다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