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화병이 나셨다. 편할 리 없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으니 엄마는 참다가 화병이 나셨어. 밥을 잘 못 드시겠다며 점점 힘이 빠지시더라고.
난 엄마와의 응어릴 치유하기 위해 같이 손잡고 만월산에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엔 갈빗집에 둘러서 고길 구워 먹고 또 시원한 냉면도 드시게 하곤 했는데 엄만 음식만 드시고 난 속의 말을 못 꺼냈다.
파킨슨병처럼 엄만 손이 떨리고 발을 질질 끌고 다니셨다. 몸이 자주 뒤로 넘어가려고 해서 집과 가깝고 큰 병원인 길병원에 부축해서 갔다. 대뜸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잉 이게 뭔 소리여? 다른 병원엘 가보자. 멈출 수 없어. 막냇동생 하고 같은 봉사활동을 하시는 사랑병원 원장님한테 의지를 했다.
간병인을 두고서 두 달이나 됐는데 확실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엄만 링겔병을 노상 꽂고 있어서 화장실 자주 가시는 걸 미안하게 생각해서 간병인 눈치를 보니 팁을 주게 했고 간병인은 자야 하니 링겔줄을 잠가놓았다. 원장님이 차도도 없는데 요양병원에 모시란다.
요양병원비는 웬만한 일반인의 한 달 급료이며 한 명의 요양사가 서 너 명을 돌봄이다. 가자마자 물을 드리려고 했더니 멋을 낸 요양사가 침대 위에 놓인 생수통을 드시게 하란다. 나중에 보니 이건 침대가 흐트러지지 말라고 고정해놓은 물병이었다. 참 괘씸하네.
병문안을 온 친가들은 엄마의 환자 주머니에 5만 원씩 넣어주고 가시고 엄만 이걸 간병인한테 쿡 찔러 드리고 난 그분들 가실 때 여비를 따로 챙겨 드렸다.
환자 보호자 한 분이 동수역의 성모병원에 가보라고 귀띔을 해주셔서 다시 119 응급차로 병실을 옮겼다. 공황 증세도 오셨는지 6인실이 싫으니 3인실로 옮겨달라고 요구하셨는데 빈자리가 아직 나지 않았으며 다행히도 엄마 마음에 쏙 드는 엄마가 “엄마”라고 존칭을 써드렸던 간병인 분을 잘 만나서 두 달 만에 걸어 나오셨다. (마음의 병이셨을까?)
점점 나아지시니 엄마는 예전처럼 식구들 밥을 챙기고 반찬을 하셨다. 매일 어지럽다고 하시며 간간이 성모병원엘 다니셨는데 나나 아니면 내 아이들이 여길 모시고 다녔다. 10여 년 이랬는데 어느 날 “소변에 피가 비친다.” 하시는 걸 내가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아 늦게 성모병원에서 피검사를 하게 됐다. 방광암이라네. 날벼락이다.
담당의는 몇 기냐고 몇 번씩 문의해도 정말 알려주지 않더니 해외 유학에서 얼마 전 온 유명 전문의라며 소개와 함께 수술을 권유했다. 엄마는 병실에서 구성진 노래도 하시고 곧 퇴원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셨던 것 같다.
수술비 천만 원은 5~6년 생명 연장 이라더니 웬걸 수술 끝나자마자 오줌 주머닐 차시고서 때때로 수혈을 받으셔야 했다. 가족들의 헌혈증 500매는 쓸 필요가 없고 같은 혈액형을 하루 전에 수혈해서 증서를 가져와야만 병원에 보관된 혈액을 맞을 수 있다네. 나는 저체중에 과중업무로 빈혈도 심해서 둘째 동생이 헌혈대에 올랐다. 두 번을 해줘서 30만 원씩 두 번 소고기 사 먹으라고 해줬어. 내가 먼저 나서지 못함에 굉장히 미안했거든. 조카들은 뒤로 발뺌을 해서 내 맏사윗감이 헌혈대에 올라주고. (난 이게 너무 고마워서 뒷 손으로 내 사위한테도 고마움을 이따금 전한다.) 뭣이 중요해. 이심전심이야.
뻥이다! 엄마는 수술 한 달 만에 이 세상을 뜨셨다. 십 년 앞을 더 봤는데 아니었어.
(엄마가 장기간을 더 사실 수 있다는 안도감에 담당의한테 소고길 좋은 놈으로 남동생이 사다 드렸구먼 헛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