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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16. 2021

내 기꺼이 너희들의 반역자가 되어 주리라

10. 세상에서 가장 불온한 사내, 아나키스트 박열

이 영화는 고증에 충실한 실화입니다     


영화와 함께 올라온 짧은 문구. 매우 인상적이죠. 대부분의 영화는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이며...’ 이런 자막을 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영화 <박열>은 다릅니다. 고증에 자신 있다는 표현이자, 실제 사건과 인물의 삶이 그만큼 드라마틱했다는 걸 의미하겠죠.

       

일제강점기에 그것도 일본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고 재판장에게 반말을 한다? 대로변 가게 벽면에 빨간색 하트를 그리고 거기에 ‘반역(反逆)’이라 적어 놓는다? 재판을 받던 박열과 후미코 두 남녀가 별도의 공간에서 사적으로 만나고 야릇한 사진까지 찍는다? 이 모든 설정은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은 실제였습니다.      



영화 <박열>에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가 내각회의에서 발언하는 장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리통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여기저기 불 지르고 다닌답니다.”

“누가? 누가 그래?”

“누가 그럽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 강도의 대지진이 일본 관동지역을 강타했습니다. 불길은 목조건물을 타고 빠르게 번져 도쿄와 주변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45만 여 가구가 전소되고, 10만 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관동대지진입니다.        


가뜩이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경제는 내리막이었죠. 일자리가 줄며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지진까지 더해지니, 대중의 불안과 공포가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일본 내각은 성난 민심을 억누를 계엄령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가 유언비어 하나를 들고 나옵니다. 근거도 출처도 없는 가짜뉴스였습니다. 내부의 갈등과 불만을 외부, 특히 조선으로 돌리는 일본의 오래된 악습이 재현되는 것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하고 3시간 뒤부터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퍼져 나갑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곧 있으면 조선인들이 습격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6시에 계엄령이 내려집니다.            

영화 <박열>에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자경단

무장한 군대와 경찰은 수많은 조선인을 죽였습니다. 학살의 또 다른 축에는 자경단이 있었습니다. 자경단은 일종의 향토예비군 개념으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그들은 사실상 군경의 방조 아래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조선인들을 색출했습니다. 일본말로 ‘15엔 55전’, 조선사람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를 시켜보고 제대로 못하면 죽였습니다. 죽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었습니다. 양손을 묶어 강물에 집어 던지고, 산 채로 불길에 집어 던졌습니다. 오토바이에 줄로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 달렸습니다. 9월 1일부터 6일 사이에 희생된 조선인이 6,661명. 관동대학살입니다.


지진으로 생긴 공포와 불만을 일단 조선인에게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학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습니다. 이슈를 이슈로 덮을 또 다른 음모가 필요했습니다. 미즈노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인들에겐 영웅, 일본인들에게는 악당.’ 그들은 그 역할을 해줄 사람으로 박열을 지목했습니다.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을 다니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하지요. 퇴학을 당합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을 돌리고 인력거를 끌며 고학했습니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여러 사상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불령선인. 일본 당국이 불온한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죠. 영화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단체는 ‘불령사’. ‘우리는 불온한 조선인들이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일제를 향한 조롱이었죠. 불령사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8명의 일본인들도 함께 했습니다.     

영화 <박열>에서 불령사의 회의 장면

영화에서 불령사 회원들이 회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로 의견이 대립하여 분위기가 묘해지자, 후미코와 박열이 나서죠.     


“무정부주의자는 본인 자유의지에 맡기는 거 아니야?

“그럼. 할지 말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로 했잖아.”     


짧지만 아나키즘을 잘 묘사한 장면입니다. 사실 ‘무정부주의’라는 용어 때문에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가 큽니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하면 일단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죠. 아나키즘의 어원은 라틴어로 ‘아나르코스(anarchos)'인데 이 말은 ’지배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무정부주의보다는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겁니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은 9월 3일에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연행됩니다. 한 달 후 ‘비밀결사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됩니다. 그들을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취조 도중, 박열이 의열단을 접촉하여 폭탄을 들여오려 했었다는 사실과 가을에 있을 왕세자 결혼식에 맞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합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정부와 검찰은 박열과 후미코를 폭동과 일왕 암살을 모의한 '대역사건'의 주동자로 엮었습니다.      


박열이 실제로 폭탄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고, 일본 군국주의의 꼭대기에 앉아있던 일왕과 왕세자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상상은 몇 천 번이고도 했겠죠. 하지만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 아니었습니다. 관동대학살에 대한 비난여론을 덮기 위한 완벽한 날조였습니다.     


대역사건의 주모자. 박열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꺼이 그들이 깔아놓은 판에 오르기로 하죠. 안중근 의사가 법정투쟁을 통해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전세계에 알렸듯, 대역사건 재판 과정에서 관동대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노라 결심합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4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 것. 둘째, 재판장과 동등 높이의 좌석에 앉게 해줄 것. 셋째, 조선을 대표하여 일본법정에 서는 것이니 조선 관복을 입게 해줄 것. 넷째, 조선어를 사용할 테니 통역을 붙여줄 것. 박열 측 후세 변호사는 일본법원과 협의하여 첫 번째와 세 번째 요구를 관철시켰습니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급한 쪽은 일본정부였죠. 최대한 빨리 대역죄로 기소하여 판결을 내려야했기에 무리해 보이는 박열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습니다. 박열과 후미코가 감옥에서 서신왕래 하는 것은 물론이요, 별도의 공간에서 둘 만의 시간도 허용해주었습니다.      

영화 <박열>에서 재판정에 사모관대 차림으로 등장한 박열

일제의 음흉한 설계에 맞선 박열의 파격적인 법정투쟁은 여론의 큰 관심을 끌어냅니다. 첫 공판이 열리는 날에는 2시간 전에 방청석이 매진됩니다. 분홍색 사모관대(紗帽冠帶, 조선 관료들의 복장)를 착용하고 부채를 손에 들고 나타난 박열, 치마저고리를 입고 안경을 쓰고 나타난 후미코는 법정 아니 일본 열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재판정에서의 변론도 뜨거웠습니다. 재판정은 박열과 후미코,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연설장이 되었죠.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 군주제의 모순과 폐해, 식민지배의 부당성, 관동대학살의 진실에 대해 그들은 거침없이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1926년 3월 26일, 최종판결에서 일본법정은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후미코는 만세를 불러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일제는 그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왕의 이름으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각각 다른 형무소로 이감시켰습니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 일본 내에서 비난 여론이 커지면서 내각은 총사퇴합니다.

석 달 후 후미코는 세상을 떠납니다. 당국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사인이 규명되지 않은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 죽음이었습니다. 후세 변호사와 불령사 동지들이 노력하여 후미코의 시신을 수습하고, 박열의 형이 유골을 가져가 경북 문경 박열의 고향에 묻어주었습니다.  


박열은 무려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1945년 10월에 석방되었습니다. 출옥 후에는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일본에 있던 이봉찰,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를 수습해 서울 효창원에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재일조선인거류민단에서 활동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었고, 1974년에 평양에서 숨을 거둡니다. 


남북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이유 등으로 한동안 박열이라는 독립운동가는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습니다. 국적을 뛰어넘은 박열과 후미코의 열정적이고 혁명적인 사랑도 그저 가십거리로 취급되었습니다. 영화 <박열>을 통해 두 사람과 아나키스트들의 뜨거웠던 청춘이 되살아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박열은 현재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습니다. 후미코는 박열의 고향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재회를 가로막고 있는 분단의 벽은 여전히 높고 차갑게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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