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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20. 2021

안옥윤의 얼굴에 비친 여전사들 (上)

12.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의 249원 80전

“저는 어디로 갑니까?”

“경성.”

“잘 됐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가면 뭘 해보고 싶은데?”

“뭐, 커피라는 것도 마셔보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일이 제일 중요하겠지만요.”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은 김구와 김원봉이 계획하고 있는 거사를 실행할 요원들을 만나러 갑니다.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에서 안옥윤을 데려옵니다. 부대를 떠나기 직전 안옥윤과 염석진의 대화죠. 경성에 가면 그 나이대 여성들이 꿈꾸는 로망을 만끽해보고 싶은 안옥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총을 들죠.     

영화 <암살>에서 암살 임무를 위해 차출되는 안옥윤

3.1 운동의 열기에 깜짝 놀란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문화통치를 들고 나옵니다. 그 이전의 무단통치에 비하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만술에 불과했죠. 언론, 출판, 교육 등에서 일정 정도의 자유를 허용해주는 척하며 실질적으로는 민족진영을 분열시키고 회유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친일로 돌아서는 자에게는 당근을, 계속 항일하는 사람에게는 더 강력한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에게 1930년대는 희망이 점점 사라져가던 시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으로, 해외에서는 무장투쟁으로 계속 싸우고 있었지만 일본의 힘은 커져만 갔죠. 일제는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웁니다. 중국본토도 계속 위협하고 있었죠. 이런 일본이 금방 망할 거라고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조선이 독립하는 날이 올까? 변절하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경성에는 고급 백화점이 들어서고 댄스홀에는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현실에 맞추어 살아간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암울한 시대에도 이봉창과 윤봉길은 폭탄을 던졌고, 만주에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자령전투가 있었던 것도 1933년의 일입니다. 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죠.     


‘1933년, 경성’을 무대로 삼은 영화 <암살>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화려한 캐스팅, 탄탄한 시나리오, 탁월한 연출이 빚어낸 <암살>은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은 영화 중에서 역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저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그래도 알려줘야지. 우리는 싸우고 있다고.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죽을 고비를 넘긴 안옥윤이 하는 말이죠.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목표를 조준하고, 총을 쏘아 적들을 쓰러뜨리는 여전사 안옥윤은 누구를 모티브로 하였을까. 영화 덕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자현 의사(義士)가 조명을 받았습니다.         


남자현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군의 어머니’, 다른 하나는 ‘여자 안중근’.     


열아홉에 시집가고 3년, 을미의병(1895년)으로 집을 떠난 남편은 이듬해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뱃속에 있던 아들을 낳아 키우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내던 남자현은 1919년 3월, 만세 열기가 한창이던 때에 만주로 떠납니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죠. 그때가 마흔일곱, 요즘으로 치면 환갑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독립군 부대에 몸담았던 그녀는 청산리대첩이 일어났을 때 후방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때, 옆에 있던 남자현을 어머니로 여기며 고통을 견뎌냈다고 하죠.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애칭이 ‘독립군의 어머니’입니다.     


1926년 4월, 남자현은 남편의 의병 동지였던 채찬, 이청산과 함께 경성으로 왔습니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서였지요. 4월 26일에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승하했고, 이틀 뒤 28일 창덕궁으로 총독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이 조문을 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일본 경찰이 다급히 움직였습니다. 총독을 노렸던 또 다른 투사가 먼저 거사를 실행했던 거죠. 스물아홉의 청년 송학선 의사였습니다. 그는 칼을 들고 자동차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송학선이 찌른 사람은 사이토가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이었습니다. 이 일로 경계가 삼엄해지자 남자현 일행은 계획을 중단하고 만주로 돌아갑니다.     


1931년에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의 장제스는 국제연맹에 이 문제를 제소했습니다. 이듬해 연맹에서는 조사단을 하얼빈으로 파견합니다. 남자현은 국제연맹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혈서를 써 조사단에 전달합니다.

朝鮮獨立願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

그녀가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게 된 연유입니다.     

영화 <암살>의 안옥윤 (좌) / 남자현 의사 (우)

1933년 봄, 남자현은 마지막 거사에 나섭니다. 신경에서 만주국의 건국절 기념행사가 열리는데, 여기에 참석하는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노렸습니다. 안에는 남편이 전사할 때 입고 있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겉은 걸인처럼 변장했습니다. 그녀는 중국인 동지로부터 권총과 폭탄 상자를 건네받았습니다. 그런데 하얼빈 역으로 가던 중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습니다. 밀정 이종형 때문이었습니다.       


남자현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하얼빈의 감옥에서 6개월을 보냈습니다.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그녀는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1933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임종 직전에 그녀는 아들에게 감춰두었던 행낭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 속에는 중국화폐로 249원 80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남자현은 그 돈 가운데 200원은 독립이 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나머지 돈은 손자와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키라고 당부합니다. 아들 김성삼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3.1절 기념식장에서 김구 선생에게 200원을 전달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온몸을 던져 싸운 그녀의 결기는 영화 속 안옥윤의 모델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총과 폭탄을 품고 암살 작전에 투입되는 것도 영화 스토리와 흡사하죠. 하지만 실제로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던 건 아닙니다. 그러면 실제로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진 여성 투사들은 없었던 것일까요? 안옥윤의 얼굴 너머로 다른 두 사람, 안경신과 박차정이 보입니다.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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