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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17. 2021

개새끼를 사랑한 여인,
개새끼를 변호한 남자

11. 독립유공자가 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짓는
달을 보고 짓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 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억압에 맞선 아나키스트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박열의 시 ‘개새끼’. 가네코 후미코는 그 시를 읽고 완전히 반해버립니다.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고, 그 일이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죠. 후미코는 박열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먼저 동거를 제안합니다.     

영화 <박열>에서 박열과 후미코가 동거서약을 하는 장면

영화에서 박열은 김중한과 함께 상하이에서 몰래 폭탄을 반입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죠. 자신과 상의하지 않고 일을 추진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후미코는 박열의 뺨을 후려칩니다.     


“동거서약 잊었어. 나를 동지로 여기지 못하면 너랑 같이 못가!”     


사회운동을 함에 있어 자신을 여성이 아닌 동지로 여긴다는 서약을 어겼다는 것이죠. 후미코는 여성 이전에 한 명의 단단한 개인으로 서고자 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후미코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1903년에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고, 호적에도 오르지 못해 무적자(無籍者) 신세로 지내야했죠. 9살이 되던 해에는 고모가 있던 조선으로 보내집니다. 고모집에서도 사실상 식모 취급을 받으며 학대를 당했습니다. 열여섯 살 무렵에는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죠.      


조선에 있을 때 직접 목격한 3.1 운동은 그녀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권력에 대한 반역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올랐다.’고 회고합니다. 후미코는 자신의 처지를 조선인들에게 투영하여 조선의 독립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1919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만 가족들은 여전했습니다. 그녀는 혼자 도쿄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공부했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는 못했지만 많은 책을 읽으며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합니다. 1922년에 박열을 만납니다.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함께 조직하고 기관지를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박열과 함께 연행되어 일왕 암살모의 혐의로 법정에 섰습니다.      

영화 <박열>에서 후미코가 법정에서 변론하는 장면
“천황제 사상은 권력의 이익을 탐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형용사로 포장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희생시키려는 권력자들의 잔인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은 특권계급의 노예가 되는 것임을 경고한다.”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본질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후미코는 우스갯소리로 자신이 박열의 과외 선생이었다고 얘기할 만큼, 사상과 행동이 일치하는 아나키스트 혁명가였습니다. 최종공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자 만세를 외쳤죠.     


이렇게 당당하고 대범했던 사람이 사형선고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사였습니다. 최종판결이 있기 전에 후미코와 박열은 혼인신고를 했기에, 그녀의 유해는 경북 문경의 박열 고향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하고 1년 뒤인 2018년,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습니다. 박열의 연인이기에 앞서 모든 억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자유인,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혁명가로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 것 같아 흐뭇합니다.     



영화 <박열>에서 변론하고 있는 후세 다쓰지

관동대학살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된 일왕 암살 대역사건. 법정투쟁을 통해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박열과 후미코. 진실을 향한 이들의 치열한 싸움, 결국 역사에서 승리한 이들의 싸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입니다.     


후세 변호사는 박열과 후미코가 대역죄인이 아니라는 점을 규명함과 동시에, 일본정부가 은폐하고 있던 관동대학살의 전모를 드러내는데 집중했습니다. 대학살을 누가 주도했는가, 조선인들이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가, 정확한 희생자의 숫자는 얼마인가를 당국에 물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정부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학살 1년 뒤인 1924년, 본인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보고서를 강연회를 통해 발표합니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죠.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26년에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살로 희생되고 고통 받은 모든 조선인들에게 사죄한다는 기고문을 신문에 싣기도 했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그가 ‘독립운동 전문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시점은 1919년부터입니다. 도쿄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으로 구속된 조선인 유학생들을 변론하게 되죠. 이후 1923년에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반입사건’으로 구속된 의열단 김시현 지사를 변호했고, 이듬해에는 일본왕궁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 김지섭 지사를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변론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감형을 받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법정에서 당당히 밝히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이기도 했을 겁니다.      


후세 변호사는 일본의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이고, 독립운동은 당연한 저항권 행사이므로 무죄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설령 일본의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특수한 사유 때문에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의 강한 처벌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

어려서부터 제자백가 중에서 묵자(墨子)의 사상을 좋아했고, 톨스토이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타고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열다섯 살 때는 동학농민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돌아온 마을 아저씨들이 조선인 학살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지요. 일본의 조선병합은 아무리 치장하더라도 그 실체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것이 후세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는 후세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하숙집을 운영했는데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단골손님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우유 배달부는 무료로 우유 2병씩을 매일 그의 집에 넣어주었다고 하죠. 당시 일본에서는 일종의 민방위훈련인 방공훈련이 있었는데, 바쁜 후세를 대신하여 하숙생들이 대리출석을 하기도 했답니다. 후세 변호사가 변론을 위해 조선에 왔을 때, 그 소식을 알리는 호외에 모든 조선인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왔소. 왔소. 후세씨, 우리를 살리러 또 왔소!’     


후세 변호사가 우리에게는 은인이지만 일제의 눈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겠죠. 1932년에 일본은 후세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합니다. 그의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44년에는 후세의 사상을 따라 반전운동을 하던 셋째 아들이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사망합니다.      


일본 패망 후 후세는 다시 변호사로 복귀합니다. 1950년까지 일본에서 있었던 조선인들의 형사사건은 후세가 도맡았다고 합니다. 1953년 9월, 대장암으로 눈을 감을 때에도 그는 한국의 분단과 전쟁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사실 후세의 활동이 조선인 변호에 국한되었던 건 아닙니다. 일본의 노동자들, 핍박받던 대만인, 사회적 약자 등 그는 양심의 편에 서서 모든 이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사상과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2004년에 한국정부는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후세 다쓰지의 묘비명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요즘도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SNS에 떠돕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정부에서는 관동대학살에 군경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학살이나 매장의 흔적이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동대학살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건입니다.


‘한국인들은 물러가라’는 도쿄 한복판의 혐한 시위, 재일동포들을 위협하는 극우단체, 최근에 있었던 일본정부의 부당한 무역조치, 잊혀질만하면 터지는 정치인들의 망언.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한일 양국의 관계회복이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회의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지금보다 더 암울했던 100년 전에도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줄기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숫자가 적다고 하여도 일본 내에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그들과의 연대가 막혀 있는 길을 여는 궁극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한일 간의 평화는 국가라는 차원을 넘어설 때 비로소 풀 수 있는 숙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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