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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20. 2021

안옥윤의 얼굴에 비친 여전사들 (下)

13. 폭탄을 던진 임산부 안경신, 전선에 나가 싸운 박차정

저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그래도 알려줘야지. 우리는 싸우고 있다고.
영화 <암살>의 한 장면


폭탄을 든 여전사, 안경신


평안도 출신의 안경신 의사(義士)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일경에 체포되어 한 달 가까이 구금되었다 풀려납니다. 이후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죠. 이 단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곧 일제에 조직이 발각되면서 중국 망명길에 오릅니다.      


3.1 운동을 겪으며 그녀는 평화적인 시위, 독립청원 같은 방식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독립의 유일한 길은 무력투쟁이라는 결론을 내리죠. 그녀는 임시정부의 직속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합니다.      


1920년 8월에 미국 의원단이 동아시아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릴 기회라고 판단한 광복군 총영에서는 경성, 평양, 신의주 세 곳에서 폭탄 거사를 계획합니다. 안경신은 평양 작전에 자원했습니다. 대원들 중에는 여성이 이런 작전에 참여하는 건 위험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의 의지는 굳건했습니다.     


안경신과 동지들은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경비병 한 명을 사살합니다. 그리고 8월 1일 평양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안경신은 치마 속에 폭탄을 숨겨 들여오는 임무를 완수하지요. 8월 3일 밤, 3개조로 나누어서 평남도청, 평양경찰서, 평양시청에 각각 폭탄을 던지는 작전을 개시합니다. 펑! 하는 굉음이 평남도청을 울렸습니다. 성공!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경비병 2명이 폭사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는 아쉽게도 폭탄이 불발되었습니다.       

안경신 의사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은 몸을 숨겨 다시 국경을 넘어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안경신은 동지들을 따라가지 않았죠. 뱃속에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은신처를 찾아 숨어든 그녀는 7개월 후 출산합니다. 하지만 수사망을 좁혀 오던 일경에 곧 체포당하고 말죠. 생후 12일이 된 아기를 안고 그녀는 끌려갔습니다.


1심에서는 사형, 항소심에서는 10년형이 내려졌습니다. “조선사람이 조선 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게 무슨 죄냐!” 재판정에서 시종 당당했던 그녀는 검사의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여 방청석을 놀라게 했다죠. 신문에는 ‘청산유수 같은 안경신’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6년 옥살이를 마치고 가출옥으로 나온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애통한 소식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수감되고 3개월 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출산했던 아기는 영양실조로 눈이 멀어 장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거사를 했던 동지 장덕진은 중국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이후 안경신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눈이 먼 아들과 남은 가족에 대한 소식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1962년 그녀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아직까지도 국가보훈처에서 훈장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총을 든 여전사, 박차정


박차정 의사(義士)는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아버지 박용한은 동래에서 명망 높은 지식인이었는데, 나라 잃은 수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습니다. 그녀의 오빠들과 남동생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총을 든 국어학자’ 김두봉, 독립운동가 김두전이 외가 친척들이었죠. 항일운동의 유전자를 타고 난 그녀에게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동래일신여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친구들에게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니며 동맹휴학을 주도하곤 했습니다. 1927년에 결성된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박차정은 전국 규모의 민족운동, 여성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근우회는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단체들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단체들이 합작하여 만든 조직이었죠. 글 솜씨가 빼어났던 그녀는 주로 출판과 선전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에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학생시위였습니다.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곳의 여학교에서도 동조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배후로 지목된 박차정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납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녀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박차정은 곧바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랑에 빠지게 되죠. 상대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이었습니다. 1931년 3월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했다고 하여 그녀에게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김원봉 못지않은 혁명가가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박차정과 김원봉

그 시기 약산은 의혈투쟁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적이고 장기적인 방향의 독립투쟁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932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교합니다. 항일투쟁을 이끌 고급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었죠. 박차정은 이 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의식교육과 비밀공작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김원봉은 1938년 중국 창사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전쟁을 수행할 군사조직이었죠. 조선의용대는 주로 전선에서 정보수집과 포로 심문, 선전공작 등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의용대 내에는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도 있었는데. 박차정은 단장을 맡아 활약했습니다.      


중일전쟁의 전선은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광시성 곤륜관 전투에 투입됩니다. 병력으로나 화력으로나 일본군에 밀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일본군이 쏜 총탄에 박차정은 늑골 부위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5월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해방 후 김원봉은 그녀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자신의 고향인 밀양 감전동 뒷산에 묻어주었습니다. 친일파들의 득세와 친일 경찰 노덕술의 횡포에 시달렸던 약산은 결국 월북을 선택하지요. 이후 김원봉 이름 석 자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박차정의 묘 또한 돌보는 사람 없이 쓸쓸히 버려졌습니다.     


다행히 박차정은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습니다. 박차정 숭모사업회가 발족하여 그녀의 묘가 단장되고 생가도 복원되었습니다. 고향인 부산 금정구에는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남자현, 안경신처럼 폭탄을 품었던 여성투사는 몇 명 있었지만, 총을 들고 일본군과의 직접 교전을 벌인 인물은 박차정이 유일합니다. 그녀의 동상이 총을 들고 있는 이유입니다.     

부산 금정구에 있는 박차정 의사 동상




“우리 조선 여성을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여성은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경제/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여성은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 1936년, 박차정이 결성한 난징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한 대목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과 더불어 ‘봉건적 가부장제’라는 두 가지 벽을 깨기 위해 싸워야했습니다. 실제로 이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모두 말해보라고 질문하면, 대다수가 ‘유관순 누나’를 대답하고 나서 다음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기 마련입니다.        


2020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477명, 전체 대비 5%를 넘지 못합니다. 그나마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여성 독립유공자의 비율도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꼭 무장투쟁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조국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살다간 제2, 제3의 안옥윤이 발굴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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