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골든타임을 놓친 친일청산과 그들의 좋은 세상
“피고인, 개인적으로 반민법이 개시된 소감은 어떠합니까?”
“역사적으로나 민족정기를 생각할 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투서 한 장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나는 독립운동 외에는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암살>을 보면서 가장 분노하는 장면은 반민특위법정에 선 염석진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궤변을 늘어놓고 담배를 꺼내 무는 그에게 방청객들이 야유를 보내지요. 염석진은 갑자기 웃통을 벗어젖히고 자신의 몸에 박힌 총탄의 내력을 나열하며 방청석을 윽박지릅니다.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라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거름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영화지만 밀정이었던 그의 뻔뻔함에 울화가 치밀죠. 염석진의 캐릭터는 일제강점기 여러 친일파와 밀정을 참고하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실존인물은 이종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짧은 독립운동 이력과 변절, 화려한 밀정 생활, 반민특위법정에서 과거의 악행을 부인하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 거의 판박이입니다.
이종형은 1895년생입니다. 본인 주장으로는 3.1 운동 때 일본 순사 2명을 때려잡고 19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기록과 양형 기준으로 봤을 때 이는 거짓입니다. 1920년 항일무장단체 보합단이 군자금을 모금하는 거사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은 것이 이종형의 실제 독립운동 이력입니다.
1921년에 수감되었으나 풀려난 시점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종형의 이름은 1930년 만주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때부터 밀정 행위가 드러나는데, 아마도 수감생활 중 변절하고 만주로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하기 위해 의열단에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이종형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고 있던 만주국 초공군사령부와 짜고 길림성에 있던 애국지사 50명을 체포하여 17명을 교살하고 투옥시켰습니다. 1933년에는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암살하려던 남자현 의사를 밀고하지요. 이때 구속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의사는 고문과 수형생활의 후유증으로 얼마 뒤 순국하고 맙니다.
1941년 귀국한 후에도 조선총독부 경무부 촉탁으로 악행을 이어갑니다. 경무국 보안과, 조선주둔군, 헌병사령부와 연결되어 국내외를 넘나들며 엄청난 실적을 올립니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장명원, 권태석, 김만룡, 김선기, 이상훈, 박시목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일제 경찰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죠. 특히 이종형의 밀고로 투옥되었던 박시목 지사는 해방되던 바로 그날 1945년 8월 15일에 옥중에서 서거하셨으니, 그 애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해방 후 이종형은 많은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극우반공주의자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종형은 1945년 11월에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을 창간합니다. 신문을 통해 극단적인 반공논리로 이승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세력을 공격했죠. 여운형 선생에 대한 암살모의사건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가 미군정으로부터 3개월간 정간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극우테러리스트들의 배후에는 이종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하 받은 적산(敵産,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을 불법적으로 처분하고, 수재의연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권력에 줄을 대고 있던 이종형은 처벌을 받지 않았죠.
무엇보다 이종형은 친일청산 움직임이 나타날 때마다 극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신문 지면과 대규모 관제집회를 동원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공격했습니다. 이종형은 반민법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반민법은 망민법이다."
"친일파 문제는 그 시대 공동의 책임이다. 합병조약 같은 중대행위자 외에는 모두 직업상 종사한 자들이다."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다. 김일성 앞잡이들을 숙청해야 한다."
친일청산 과제를 이념문제로 몰아가고 국론분열이라고 성토하는 목소리. 지금도 종종 듣는 이야기 아닌가요.
1948년 9월 22일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는 이듬해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갑니다. 일제강점기 최고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처음으로 검거되고, 뒤이어 두 번째로 이종형이 검거되었습니다. 체포과정에서도 그는 권총을 빼어 들고 난동을 부렸다죠.
이종형의 공판은 주로 만주에서 일정으로 암약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고 학살한 혐의가 다뤄졌습니다. 그는 심문과정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을 뿐이며, 공산당을 때려잡은 애국자에게 훈장을 달아주지는 못할망정 쇠고랑을 채우려 하느냐며 가슴을 치고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반민법이 제정되는 과정도 반민특위의 활동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과 해방 후 이미 기득권이 되어있던 친일세력의 반발 때문이었죠. 결국 1949년 6월 6일, 정권의 비호 하에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사실상 특위활동은 끝나버립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종형도 곧 풀려났습니다.
영화에서 염석진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고 법정을 나오며 대기하던 경찰의 사열을 받죠. 사실 이 장면은 이종형의 이야기는 아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대표적 친일경찰 노덕술의 사례에 가깝습니다.
풀려나온 염석진은 차로 모시겠다는 부하의 청을 물리치며 이렇게 이야기하죠.
“좋은 세상이잖아. 좀 걷고 싶군.”
그리고는 어느 골목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안옥윤(전지현)과 임시정부 요원 명우(허지원)와 마주합니다. 안옥윤과 명우는 16년 전 김구 선생이 내렸던 명령을 이행합니다. 권총으로 염석진을 통쾌하게 단죄하지요.
풀려나온 이종형의 말로는 어떠했을까요? 어이없게도 이종형은 1950년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출마하여 강원도 정선에서 당선됩니다. 이승만 정권에서 훈장을 세 개씩이나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노덕술 못지않게 이종형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제대로 하지 못한 심판에 하늘이 노했던 것일까요. 국회의원 임기 도중이던 1954년에 이종형은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특이한 점은 이종형의 이런 명백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식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는 객관성 확보를 위해 해방 이전 1차 사료(1945년 이전의 자료)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형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12명이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가 밀정이었던 탓에 공식적으로 그의 혐의를 입증할만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죠. 해방 직후 당연히 했어야 할 친일청산이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결과입니다.
반민법의 시행 결과는 이렇습니다. 조사 대상자 682명 중에서 221명이 기소되었습니다. 재판이 종결된 38건 중에서 단 12명만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나마 5명은 집행유예로 나머지 7명은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로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처벌된 사람은 0명입니다.
반면에 단 5년 동안 나치독일에 나라를 내주었던 프랑스는 해방 이후 대략 3만~4만 명의 부역자들을 처벌했습니다. 민족의 혼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학자나 언론인에 대해서는 가중처벌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백발의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치부역 혐의가 드러나면 지금도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민족 범죄자에게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거청산이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는 질문에 드골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하지요.
"언젠가 프랑스가 힘이 약해지면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