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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21. 2021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언어독립투사 이극로

15. 변절자 제로, 말모이 프로젝트를 완수한 조선어학회

1941년 김판수의 아들 덕진이 다니는 중학교 교실. 밀린 월사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이 엎드려뻗친 상태로 교사에게 매를 맞고 있습니다. 한 학생이 얼떨결에 “엄마야” 비명을 지릅니다. 교사는 그 학생을 일으켜 세워 사정없이 따귀를 때립니다.     


“학내에서 조선어가 금지된 지가 언젠데!”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로 신음 소리를 내었다고 따귀를 맞는 학생

1938년에 일제는 3차 조선교육령을 내려 일본어 사용을 강제합니다. 전쟁의 광기가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부터는 아예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가 폐지되고 모든 교과서가 일본어로만 편찬됩니다.     


조선어를 압살하기 위한 간계는 교육시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학교에서나 ‘국어상용’이라는 표어가 붙었습니다. 여기서 국어란 일본어를 뜻하는 것이죠. 벌금통을 만들어 조선어를 쓸 때마다 1전씩 넣도록 하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동덕고등여학교에서는 ‘국어애용상자’를 곳곳에 설치하여 조선어를 쓴 학생의 이름을 적어 넣도록 하고, 매주 월요일 상자를 열어 고발된 학생들에게 처벌을 내렸다고 하지요.      


함경도 길성국민학교에서는 국어를 쓰지 않은 학생은 X자 도장이 찍힌 ‘국어상용 위반장’을 목에 걸어야했습니다. 적발된 학생은 다른 학생을 잡아내야 위반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위반장을 넘기지 못해 애가 타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친구에게 물을 끼얹고 엉겁결에 조선어가 튀어나오게 했다지요. 어린 학생들이 친구를 감시하고 고발하게 만드는 비열한 수작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일본어를 강제 했습니다. 관공서에서 일을 볼 때, 일본어를 쓰면 일처리를 빨리 해주고 조선어를 쓰면 민원접수를 안 해주는 꼼수가 동원되었습니다.         


조선어를 없애 조선인의 머릿속에 일본의 정신을 심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겠다는 악랄한 시도. 여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죠. <말모이>는 사전 편찬을 소재로 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민중들이 힘을 모아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낸 역사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류정환의 공청회 연설 장면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영화에서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고 비밀리에 극장에 모여 공청회를 개최합니다. 대표 류정환이 연단에 올라 하는 말이죠. 이 발언을 했던 실존인물은 이극로 선생입니다. 조선어학회에서 간사장을 맡아 우리말사전 편찬을 주도한 이극로는 영화 속 류정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극로는 1893년 경남 의령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12년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떠납니다. 1915년에는 홍범도의 포수단에 가담하기도 했죠. 1916년부터 상하이 동제대학에서 공부했고, 1922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습니다.       

이극로 선생

그가 우리말과 글 연구에 매진하게 되는 몇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만주로 향해 가던 어느 날, 평안북도 창성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장에게 고추장을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주인장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한참을 있다가 “아, 댕가지장” 하며 고추장을 가져다주었다죠. 사투리 때문에 뜻이 통하지 않았던 그날의 일은 이극로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상하이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이극로는 김두봉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김두봉은 한글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주시경 선생의 수석제자였죠.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우리말 문법책인 ‘깊더조선말본’(깊고 더한 조선말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극로는 김두봉의 조수로 일하면서 한글연구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시경 선생의 사상과 학설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어강좌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수강생들은 조선어는 왜 철자법이 중구난방인지, 사전은 없는지 물었다죠. 일정한 철자법도 사전도 없는 현실에 이극로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유학시절 아일랜드를 방문하게 될 일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영어 사용을 강제 받았고, 결국 그들의 고유어인 켈트어를 잃어버렸죠. 일본에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의 현실이 떠올라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극로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언어독립투쟁을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1912년 독립군이 되겠다고 만주로 떠난 지 17년, 중국과 유럽, 미국을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돌아 1929년 1월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모여 있던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갑니다.     



1935년 현충사를 방문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꿉니다. 먼저 표기법과 띄어쓰기를 정비하여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습니다. 비로소 한글이 오늘날과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되었죠. 이어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도 통일합니다.     


사전은 모든 연구 성과의 집합체입니다.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의 숙원사업이었죠. 이극로의 주도로 1929년 한글날 기념식에서 108명의 발기인이 모여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결성했습니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작업은 말모이, 즉 어휘 수집이었습니다. 우리말은 서정성과 표현력이 매우 풍부합니다. 그만큼 어휘가 방대하다는 뜻이지요. 더군다나 사투리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말모이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습니다. 학회 소속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그 고장의 사투리를 모두 적어오게 했습니다. 그 일에 참여했던 학생이 5천명이나 되었답니다. 또 학회 기관지인 <한글>에 광고를 실어 독자들이 방언을 투고하게 합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민중들은 전국 각지에서 어휘를 적은 편지와 함께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사투리를 수집하는 장면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학회는 세 번의 큰 회의를 거쳐 표준어를 선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드디어 1940년에 조선어대사전의 원고가 완성되었습니다. 모은 어휘가 16만개에 달했습니다. 이제 출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는 소위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집니다. 조선어학회와 만주의 주요 독립운동세력이었던 대종교를 일망타진하려는 일제의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이었죠. 일제는 사전 편찬을 단순한 학술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핵심적인 독립투쟁으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학회 회원 33명이 끌려갔습니다. 일본의 발악이 극에 달하던 때였고, 그만큼 지식인들의 변절도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붙들려간 서른 세 명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변절하지 않았습니다. 이윤재, 한징 선생은 결국 옥고를 치르다 순국합니다. 가장 긴 6년형을 받았던 이극로 또한 해방을 맞아 출옥할 때 들것에 실려 나올 정도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서울역 창고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되찾는 장면

<말모이>에서는 잃어버린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학회 회원들이 함흥과 경성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증거물이던 사전 원고도 이리저리 오갔습니다. 그러다 해방을 맞으니 재판은 중단되었고 원고는 서울역 창고에서 잠들었던 것이죠.      


영화에서는 류정환 혼자서 원고를 찾는 장면으로 담담하게 표현되었는데, 좀 더 격정적으로 그렸더라도 좋았겠다 싶습니다.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찾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추가적인 교정을 거쳐 1947년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조선말큰사전 제1권이 출간됩니다.      


해방 후 이극로는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동행하여 평양에 갔던 이극로는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두봉의 요청 때문이었죠. 나라가 두 동강이 난다고 하더라도, 말이 둘로 쪼개지면 안 된다는 게 김두봉의 생각이었습니다. 남한에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많았지만, 북한에는 김두봉 말고는 마땅한 학자가 없었기에 이극로가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던 거죠. 결과적으로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에 고루 퍼져 활약한 덕분에 7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언어는 통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현존하는 3천 개의 언어 중에서 고유의 사전을 가진 20여 개의 언어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온전하게 회복한 나라입니다. 사전 편찬은 국가 지원 프로젝트라고 하여도 엄청난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대과업인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그 어려운 일을 해내었습니다. 


언어독립투쟁,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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