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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24. 2021

몽규의 계획대로
살아 학병을 탈출했다면

17. 동주와 몽규의 향기가 느껴지는 준하와 준엽의 광복군 대장정

영화 <동주>에서 유학생 모임을 주도하는 몽규

“조선인 유학생들도 징집되는 거 시간문제지...”

“제국대학 다니는 친구들은 괜찮지 뭐. 나 징집되기 전에 제국대학으로 편입할까봐.”

“이런 쉐스케 같은 새끼, 너 말 똑바로 하라. 그리고 징집을 왜 피하니?”

“그럼 끌려가자고?”

“일본군이 강한 이유는 일본군에 들어가 봐야 아는 거 아니야...... 조선인 청년들이 무기를 얻고 그걸 다룰 줄 아는 게 큰 힘인 거 너 모르니!”     


교토의 어느 선술집. 몽규가 유학생 몇 명과 앉아 있습니다. 늘 분명한 목적을 갖고 행동하는 몽규. 몽규는 학병징집을 기회로 삼아 일본에 맞서 싸우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동주에게는 알리지도 권하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동주도 결국엔 그 일에 동참하지요.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사상교육을 시키고, 비밀리에 조선어 문학과 서적을 유통시켰으며, 징집령을 이용하여 조선인 반군 조직을 결성해서 활용할 군사적 계획을 지시하였다.’      


이것이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간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였습니다. 몽규는 서명을 강요하는 일본 형사에게,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서 괴로워서 서명을 한다.”고 절규합니다.

영화 <동주>에서 심문조서에 절규하며 서명하는 몽규

만약 교토에서 체포되지 않고 몽규와 동주가 학병으로 징집되었다면 어땠을까요? 몽규의 계획대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군을 찾아갔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동주와 몽규의 성향이나 재능으로 봤을 때,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패망의 불구덩이로 달려가던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선 청년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갑니다. 학병제가 실시된 것은 1943년 10월. 동주와 몽규가 잡혀간 후 3개월 뒤의 일입니다. 영화 속 몽규처럼 이왕 일본군으로 끌려가야한다면 병영을 탈출해서 광복군에 합류하자고 생각하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건 탈출이 성공하여 광복군이 된 사람들도 꽤 됩니다.      


학도병 출신의 광복군하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준하, 김준엽 선생이죠. 그들은 동주, 몽규와 나이도 엇비슷했고, 징집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엘리트라는 점에서도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장준하도 일찍이 목사의 길을 정하고 공부했습니다. 일본신학교에서 유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됩니다.      


장준하는 중국 전선으로 나가기 전에 평양의 군부대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엄지손가락이 동상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전시에 마취제 같은 것은 없었죠. 군의관이 메스로 생살을 헤집는데도 장준하는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답니다. 일본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참았다지요. 그런데 부상당한 손가락을 보고 일본군 장교가 평양에 잔류할 것을 지시합니다. 장준하는 애원했습니다. 나가서 싸우고 싶다고 중국으로 꼭 보내달라고. 일단 중국으로 가야 탈출할 기회가 생길 것이고, 그래야 광복군을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준엽은 192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둘째 형이 독립운동을 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을 키웠습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동양사학을 공부하던 중 학도병으로 끌려갑니다.


김준엽 역시 입대 전부터 탈출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탈출에 필요한 나침반, 칼, 중국지도, 중국어사전, 중국돈까지 준비합니다. 돈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다리미로 납작하게 다릴 정도로 치밀했죠. 그리고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품에 넣었습니다. 전선에서 탈출한다고 해도 일본군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국군에게 해를 입을 수도 있겠죠. 그런 상황을 대비하여 조선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입영열차에 오른 김준엽, 그것은 일본군 입대가 아니라 광복군으로의 입대였습니다.            

게이오대학 시절의 김준엽 (좌) / 일본 유학시절의 장준하. 맨 오른쪽. (우)

김준엽은 중국에 있는 쓰가대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조선인 탈출병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부대 주변은 높은 성벽과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싼 못) 그리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일본인 장교 중에는 김준엽의 게이오대학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와 친분을 맺은 김준엽은 부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국군 유격대가 있다는 걸 알아냅니다. 경계가 허술한 날을 노려 탈출에 성공,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합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네 명의 일본군이 중국군 유격대에 붙잡혀 왔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닥에 한자로 ‘우리는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 청년들’이라고 썼죠. 조금 있다가 부대에서는 조선인 한 명이 나와 그들을 반갑게 껴안았습니다. “탈출이시죠? 저도 탈주병입니다.” 김준엽과 장준하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김준엽과 장준하 일행은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갑니다. 무려 6,000리(2,500km) 길을 7개월 동안 걸어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일본군 초소가 있는 지역을 지날 때면 상인과 거지로 위장을 해서 위기를 돌파했습니다. 전투지역을 지날 때는 일본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고, 길을 잘못 들어 산적 떼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파촉령 겨울 산을 넘을 때는 추위에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죠. 목숨을 건 대장정의 마지막 지점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습니다. 대형 태극기 아래에서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은 미군 방첩부대 OSS와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시안에 있는 광복군 2지대의 이범석 장군은 작전에 투입할 대원들을 모집했습니다. 조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학병으로 출전할 때부터 이미 목숨은 내놓았던 일. 장준하와 김준엽은 기쁜 마음으로 지원했습니다.      


1945년 4월 29일, 시안으로 떠나는 30명의 장정들을 앞에 두고 김구 주석은 연설을 합니다. 13년 전 바로 이날 아침,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바꿔 차고 홍커우공원으로 떠났다고. 백범은 또다시 조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작전으로 내몰아야하는 상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대원 한 명 한 명에게 윤봉길 의사의 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시안 비행장에 도착한 30명의 광복군들은 미군복으로 갈아입고 3개월간 OSS 특수훈련을 받았습니다. 한반도 진공작전은 먼저 국내로 침입하여 첩보활동을 벌이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임무였습니다. 그러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국민군을 조직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일이었습니다. 장준하는 경기도 책임자로, 김준엽은 강원도 책임자로 선정되어 출전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작전개시 며칠을 앞두고 일본이 항복하고 맙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습니다.     

광복군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장준하(오른쪽)




해방 후 장준하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야당 정치지도자로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다 1975년 의문의 죽음을 맞지요. 김준엽은 해방 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고려대학교 총장시절에는 독재에 맞서 싸우던 학생들을 옹호하다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총장에서 물러나야했죠. 두 사람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광복군의 지조와 기백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장준하는 <사상계>의 발행인으로 유명하지요. 김준엽도 편집주간으로 힘을 보태었습니다. 1953년 4월에 창간호를 내고 1970년 5월에 폐간될 때까지, <사상계>는 종합교양지로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족통일, 민주주의,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 고양을 편집의 방향으로 삼아 다방면의 수준 높은 글을 실었습니다. 특히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어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주었고, 역량 있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는데도 기여했습니다.      


잡지 만드는 일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동주와 몽규. 그들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장준하, 김준엽과 의기투합하여 멋지게 일했을 것 같습니다. 동주의 따뜻한 시, 몽규의 날카로운 산문이 실린 <사상계>는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요.


“못난 조상이 또 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해 광막한 수수밭에 숨어 누워 마른 침을 삼킬 때에도,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파촉령 눈밭에서 밤을 지새울 때에도 이 말을 되뇌며 고통을 견뎌냈다고 하죠. 동주와 몽규, 준하와 준엽. 야만의 시대에 태어났지만 어둠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빛나는 청춘의 이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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