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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바람 Oct 24. 2021

시인 윤동주를 데뷔시킨
강처중을 아시나요?

16. '영화' 동주에선 조연, '시인' 동주에겐 주연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정지용 시인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추천사에서 윤동주에게 보낸 헌사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윤동주라는 시인이 반짝이고 있었다는 건 기적이었습니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게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시인을 가졌다는 건 겨레의 축복입니다.      


영화 <동주>를 이끌어가는 한 축은 시집 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집을 내고 등단한 것은 아니지만 동주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의 시를 좋아하지요. 윤(尹)시인이라 부릅니다. 영혼의 단짝 몽규부터 처중과 여진이 그러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릿쿄대학의 다카마쓰 교수와 쿠미가 그랬습니다.      

영화 <동주>에서 쿠미와 동주가 만나는 장면

조선어를 모르지만 쿠미는 동주의 시를 좋아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동주의 시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영국에서 출간될 수 있도록 힘쓰죠. 영화의 엔딩도 출판사에 보낼 원고뭉치를 앞에 둔 쿠미가 시집의 제목을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쿠미라는 인물도, 영문 출판 설정도 모두 영화적 상상입니다. 그렇다면 살아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던 동주는 어떻게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을까요?      



 

훌륭한 시인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쓴다고 하여도 그것을 출판하여 대중에게 선보이지 않는다면, 또 시를 제대로 알아보고 평가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시인과 시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겠죠.     


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할 당시 77부 한정판으로 시집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 이양하 교수는 엄혹한 시기에 동주의 시가 발표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며 만류했죠. 동주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출간을 포기합니다. 대신 자신이 직접 뽑은 19편의 시를 필사본으로 3부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각각 주었습니다.     


패배를 향해 달려가던 일제는 전쟁이 힘에 부치자 조선 학생들을 징집하죠. 정병욱도 징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고향집으로 내려가서 동주에게 건네받은 필사본을 어머니께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마룻바닥 밑 항아리에 원고를 잘 숨겨서 무사히 지켜냅니다.      


정병욱의 혜안이 없었다면 동주의 시는 빛도 못보고 그대로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영화에도 등장하죠. 눈치 채셨나요? 바로 연희전문 친구 강처중입니다.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영화에서 강처중은 감초 같은 조연으로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역할이죠. 하지만 시인 윤동주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세상에 알리는데 일에 있어서는 주연이었습니다.      


처중은 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동주는 일본에서 썼던 시를 편지에 적어 보내곤 했죠. 그런 식으로 처중이 갖고 있던 동주의 시는 12편이 됩니다.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19편의 시와 강처중이 간직했던 12편의 시가 합쳐져서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해방 즈음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였습니다. 그는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소개하며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냥 시만 실었던 게 아니라, 문단에서 영향력이 큰 정지용 시인의 소개문을 붙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윤동주하면 떠오르는 사각모를 쓴 사진도 함께 실었고요.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윤동주의 시

그는 동주의 3주기에 맞춰 시집 발간을 준비합니다. ‘서시’를 서두에 놓고 나머지 30편의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마다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정지용 시인에게 추천사를 받았고, 발문은 본인이 직접 썼습니다.


영화에서 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정말 좋아합니다. 한 번 만나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죠. 실제로도 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정지용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여진과 함께 정지용 시인을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답니다.      


강처중은 남한으로 내려와 있던 동주의 동생 일주를 정지용에게 데려갑니다. 정지용은 일주에게 동주에 관한 모든 것들을 묻습니다. 집안내력부터 성격은 어떠했는지, 뭘 좋아하고 잘 했는지, 술을 마시면 주사는 부렸는지, 애인은 있었는지 등등. 정지용의 추천사에 담긴 동주에 대한 단상이 깊고 생생할 수 있던 것도 강처중의 이런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의 추천사 中     


강처중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입니다. 동주, 몽규와 연희전문 문과 입학 동기로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죠. 영화에서 배역을 맡았던 민진웅 배우처럼 키가 크고 훤칠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영어천재로 불렸고, 유쾌한 성격에 리더십도 좋아서 문우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답니다.      


영화에서 동주와 몽규가 기숙사에서 처중을 처음 대면할 때 선배인줄 알고 깍듯이 인사하는 장면이 있죠. 실제로 강처중은 노숙했던 모양입니다. 주변 지인들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또래 동기들에 비해 인생경험도 많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럽던 해방정국, 1950년에 강처중은 좌익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사형을 앞두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감옥에서 풀려났죠. 이후 소련으로 공부하러 떠난 뒤에는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강처중

그동안 윤동주 시집 출간에 대한 뒷이야기를 할 때, 정병욱 교수에 얽힌 에피소드는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하지만 빨간 딱지가 붙은 강처중은 한동안 언급할 수 없는 인물이었죠.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시집이 발간되기까지의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연희전문 삼총사의 젊은 날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져야 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갑게 마주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중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강처중의 발문 中
영화 <동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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