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음 편히 시를 쓸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급작스레 와?”
“도쿄 지내기 힘들어.”
“이 간나새끼... 하...”
“이제 도망갈 데가 없다. 그냥 끌려갈 거냐? 조선인 유학생들 규합하자. 니가 하는 일에 나도 껴줘.”
“미안하다. 내 담배 한 대 필게..... 야, 동주야.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 거이니까.”
“왜? 너는 내가 시를 쓰는 게 문학으로 도망치는 거라면서. 왜 자꾸 나를 도망치게 만드니? 너랑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몽규는 리더십도 출중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문재(文才)까지 갖췄습니다. 모든 면에서 한 발 앞서 나가는 그런 몽규에게 동주는 열등감을 느끼죠. 무엇보다 몽규는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도쿄 릿쿄대학에서 공부하던 동주는 설 곳이 없습니다.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대학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교련수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구타를 당하고 머리를 잘립니다. 조선인에 대한 징집령도 시간문제처럼 보입니다. 결국 동주는 도쿄를 떠나 교토로 학교를 옮기죠. 그리고 학병 징집을 이용해 일제와의 싸움을 계획하고 있는 몽규를 찾아갑니다.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자화상> 中에서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요? 대략 인구의 10%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그 역시 10% 정도 즈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시대를 지냈을까요?
체념하고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숨죽여 지내면서도 ‘이건 아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마음 한 구석이 무겁기도 했을 겁니다. 빛과 어둠이 선명하게 구분되는 시대에는 양심의 소리가 더욱 매섭게 들리기 마련이죠.
아마 동주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갈등과 번민으로 갈팡질팡 하는 동주의 마음에 공감이 가는 건 그 모습이 또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겠죠.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 中에서
시 한 줄 쓰는데도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동주는 자괴감에 매몰되지 않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확신하고 그 길을 선택합니다. ‘눈물과 위안’으로 내미는 악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화해이자, 그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향한 위로처럼 느껴집니다.
<쉽게 씌어진 시>는 동주가 도쿄에 있을 때인 1942년 6월 3일에 쓴 작품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동주는 몽규와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되지요.
詩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모여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영화에서 문학에 대한 관점 차이로 몽규와 논쟁을 벌일 때, 동주가 했던 말이죠. 동주의 시는 오랜 고뇌와 방황 끝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을 얻은 듯합니다.
영화 <동주>는 흑백 화면을 통해 윤동주의 삶, 그의 대표적인 시, 고등형사에게 심문받는 장면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여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다시 읽는 동주의 시는 교과서에 밑줄을 치며 봤던 그 시가 아니었습니다.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시대적 맥락과 함께 의미 깊게 다가왔습니다.
영화 <동주>의 또 다른 성과라면 송몽규의 발견이겠지요. 윤동주라는 시인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 송몽규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인간 송몽규 그 자체로도 굵직한 서사가 되지요. 태어났을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좌충우돌 저항하는 젊은 투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이 발간되면서 묻혀있던 시인 윤동주가 살아났다면, 영화 <동주>는 이름조차 몰랐던 청년문사,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부활시켰습니다.
독립운동사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건져 올리기만 하면 몽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름만 불러주면 한 편의 영화가 되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 없이 편하게 시를 쓸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한 생(生)을 바쳤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고 잊지 않는 것, 그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