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나는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짝을 만나면 ‘아, 이 사람과 결혼할 거 같다.’라는 직감이 든다고. 퇴사도 그렇단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 속 저울질이 계속된다면,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아, 이젠 나가야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 때 떠나야 한다고.
직장 생활의 끝이 보였다. 머지않았다는 막연한 느낌이랄까. 한 회사에 10년 넘게 다니며 한 해 한 해 높아져 가는 경력은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었고, 그런 만큼 나는 지치고 소진되어 충분한 충전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건 그나마 내 자유 의지로 퇴사를 생각하는 이유였지만. 언제부턴가 회사가 어려워질 때마다 이루어지는 조직 개편과 인원 감축 등으로, 상사가 동료가 후배가 회사를 떠나는 일이 잦아진 것도 직장 생활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그렇게 마음 속 사직서를 품고 다니긴 했지만, 과감하게 퇴직 결정을 내리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았다. 평균 수명이 높아진 이른바 ‘백 세 시대’에 내가 진짜 백 세까지 장수하며 살 것 같진 않지만 경제생활은 나이 먹어서까지 오래도록 해야만 할 텐데, ‘이 나이에 나가면 뭐 하며 벌어먹고 살지?’, ‘회사 안은 전쟁터라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잖아.’, ‘뭐라도 계획을 세워 나가야지.’ 하는 걱정이 퇴사로 향하는 마음을 번번이 붙잡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로지 회사에만 ‘몸 바쳐’ 일했던 스타일은 아니지만 문득문득 내가 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때로는 고민도 하며 웃고 울며 열정을 쏟고 청춘을 보낸 이 곳을 의미 있고 멋지게 나가고 싶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고 싶었다.
높은 연봉으로 다른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나가야, 혹은 퇴사 후 삶의 계획이 멋지게 세워져 있어야, 아니면 그동안 재테크라도 잘 해서 모아 둔 돈이 몇 년은 일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가야 멋있게 잘 나갔다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나가야 의미 있고 멋지게 퇴사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할 순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당당하게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내 마지막은 생각 같지 않았다. 퇴사는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권고사직은 해고가 아니라지만, 권고사직을 거부할 힘이 없는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해고나 도진개진. 회사 측에서는 권고사직이든 해고든 오래 끌어봤자 이러쿵저러쿵 말 많이 나오고 회사 분위기만 나빠지니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진행한다. 회사에서 이렇게 처리를 빠르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게 나는 수십(?) 명의 직원들과 함께 퇴사했다. 회사에서는 몇 명이 퇴사하는지도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주위에서 함께 나가는 이들이 누군지 알게 되고, 들려오는 소문으로 다른 부서의 퇴사자들의 수를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지.
그토록 고민했던 퇴사의 문제가 이렇게 한방에 처리되다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멍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에 몰려드는 오만 가지 감정은 차차 풀어놓기로 하고.
회사를 나온 지 6개월이 넘게 지났다. 마음 속 높은 파도가 요동치던 울화의 시간이 지나가고 잔잔해진 물결에 몸을 맡기듯 자유로운 마음으로 지나간 애증의 직장 생활과 그 마지막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20년이라는 긴 회사생활의 챕터를 마무리하며 작은 증표 하나는 남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갑작스럽게 얻게 된 무한한(?) 자유 시간을 보내며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흘러가는 마음과 생각의 단편을 붙잡아 기록하고 싶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지만 한 단락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는 나에게 스스로 토닥거리며 힘을 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누군가에게도 미미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