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황사가 심한 봄날 아니면 추운 겨울철에나 잠깐씩 사용했던 마스크는 이젠 우리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마스크 없는 일상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가끔씩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꼭 재난 영화 속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막 퇴사를 했을 무렵은 코로나 19의 위험성을 모두가 크게 인지하지 못했던 초기였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팬데믹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퇴사하자마자 알아본 것은 비행기 티켓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소위 ‘한 달 살기’ 같은 여유로운 여행을 야심차게 계획했다. 가고 싶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 비교적 체류비도 적게 들고 치안도 안전하다는 포르투갈을 여행지로 최종 결정한 후 도서관에서 포르투갈에 관한 책들을 죄다 빌려왔다. 어차피 그대로 하지도 못할 세세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여행은 며칠 가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동안 혼자 ‘살러’ 가는 것이니 이번만큼은 완벽하게 준비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회사 다닐 때처럼 바쁜 것도 아니니 사전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겠다 싶었다.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머무를 숙소, 근처 관광지, 맛집 등을 찾아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꿈에 부풀어 있었던가.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코로나 19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매일 인터넷으로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며 ‘가도 되나? 말아야 하나?’를 저울질했다. 늘어가는 확진자와 간혹 동양인들이 애꿎게 당한 피해 소식 등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설마 몇 달 뒤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질까 싶은 생각에 싸게 나온 비행기 티켓에 숙소까지 시원하게 질러 버리고 말았다.
코로나 19를 우습게 여기고 결단력(?) 있게 행동한 결과는 이후 두고두고 치르게 되었다. 여행은커녕 결재했던 티켓과 숙소를 취소하고 환불받느라 방구석에서 전화기와 씨름하며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퇴사 후 한동안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닐 줄만 알았던 내 삶이 생애 처음으로 온종일 방구석에만 있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햇살 가득한 포루투갈 리스본의 거리를 거닐고 있어야 할 나는 매일 동네를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집에만 있기 심심해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엄마 따라 시장에도 가고 약수터에도 나갔다. 그런데 미처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내가 이 동네서 나고 자란 토박이란 것을.
“오늘 딸래미 휴가인가 봐요.”
“어머, ○○이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월차 냈니?”
이 동네에 나를 아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그리고 내가 회사 안 가고 돌아다니는 것에 왜 그렇게 신경들을 쓰시는지. 물론 평일 낮에 생전 안 보이던 애(?)가 돌아다니니 인사차 그냥 하신 말씀들이겠지만.
그런데 동네 분들의 물음에 엄마가 흐지부지 그렇다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냥 회사 관두고 쉰다고 하면 되지, 휴가는 뭔 휴가?”
엄마는 내가 나이도 많은데 결혼도 안 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 창피한 건가 싶어 볼멘소리로 물었다.
“난 네가 불편할까봐 얘기 안 한 거지.”
퇴사하고 집에서 쉰다고 하는 게 무슨 불편한 이야기일까 싶었지만,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관뒀는지부터 이것저것 답하는 게 더 귀찮을 수도 있겠다 싶어 아는 분이 물으면 나도 대충 얼버무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 19로 인해 점차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다행처럼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답답한 마스크로 나를 반쯤 가림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다고나 할까. 아는 사람들 없는 낯선 여행지에서 나를 둘러싼 관계, 의무, 책임, 위치 등등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한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마스크를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지금은, 내가 회사 관두고 놀고 있다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도 괜찮으니 이제 그만 좀 마스크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그리고 사실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렸어도 엄마랑 하도 단짝으로 돌아다니는 통에 굳이 말 안 해도 내가 집에서 놀고 있다는 걸 이미 동네 분들은 다들 눈치 채신 듯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