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불변의 공식은 없다
세계적 인기 드라마였던 ‘사랑의 불시착’에서 김주먹은 열혈 한류팬인 북한 병사로 나온다. 그는 드라마 ‘추노’의 결말을 매우 궁금해하며, 대길이의 죽음을 알고는 충격을 받는다. 덕분에 나도 오래전 봤던 추노를 떠올렸는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추노에서 여주인공인 김혜원은 과거 자신이 노비였던 것을 고백하고, 양반 출신인 송태하를 떠나려고 한다. 당황한 송태하는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김혜원을 쫓아가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백성의 고충을 깨닫고자 했지만 노비가 없는 세상은 그려보지 않았습니다. 노비가 되어서도 그런 생각을 못했지요.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내가 옳은 생각을 세울 때까지 도와주며 기다리겠습니까?”
나에게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송태하 자신이 누명을 쓰고 노비가 되어서도 노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노비제도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적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제도가 불과 백여 년 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그 제도를 바꾸지 못했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지속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라고 해서 그들과 다른 걸까?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들이 그대로 영원할까?
예를 들어 결혼제도는 과연 당연한 걸까? 평생 한 사람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 본성에 맞는 것일까? 아니면 나중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결혼하지 않고, 수시로 동거상대를 바꾸고, 결혼과 상관없이 원하는 아이를 낳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그런데 아직은 우리에게 낯설 수 있는 이런 질문이 이미 세계 각지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비혼 출산이 새로운 가족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노르웨이, 스웨덴 등 유럽 주요 국가의 비혼 출산율은 법적 부부 출산율을 넘어섰다. 결혼하지 않고 태어나는 아이가 더 많은 것이다. 미국도 대졸 30대 여성의 25%는 비혼 출산이다. 이런 추세라면 수 십 년 후의 사람들은 결혼 제도를 구시대의 유물로 여길지도 모른다. 마치 현재 우리가 ‘나 땐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다’라는 말을 듣는 것 이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도 있다.
비단 결혼제도뿐이겠는가? 우리 생활의 모든 가치관들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기존의 권위들은 빠르게 붕괴되고, 기존의 당연한 질서도 금이 가고 있다. 과거에는 아동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는 주 6일 출근이 기본이었지만, 이제는 주 4일을 얘기하는 세상이다. 지금은 집을 모두 재산 증식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미래에는 자동차처럼 계속 가치가 떨어지는 재화로 취급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삶에 당연한 불변의 공식 같은 건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을 얼마든지 고민해도 된다. 남들의 시선이 중요할까, 나의 행복이 중요할까? 남에게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할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답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물론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전제된 삶이라면 산에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던, 결혼하지 않고 애만 낳아서 키우던, 대학을 가지 않던, 취업을 하지 않던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을 만들 수 있다.
모든 제도는 태초에 없었다. 모든 제도는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바꾸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제도가 합리적이고, 인간다운 것도 아니었다. 정당한 제도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핍박받았고, 괴로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통합하는 ‘절대 법칙’도, 누군 가가 채택한 ‘진리의 기준’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절대적 가 치, 보편적 정답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무 너졌고, 이윤 추구에만 몰두했던 초기 자본주의 역시 형태를 바꾸 며 변화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비인간적이며, 본질을 왜곡하는 현실은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어렵 게 만들고 있다.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경쟁에서 밀려난 다수는 극 소수만이 부를 독점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 다. 자산은 점점 더 소수에게 집중되고, 앞으로의 경쟁사회는 인간 을 점점 더 메마르고 각박하게 만들 것이다.
『부의 미래』에서 엘빈 토플러가 지적했듯이 제도권은 지식 기반 시스템의 발전을 오히려 방해하며, 변화의 소용돌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관료제와 제도권 조직은 고정관념 과 형식에 갇혀 근본적인 전환에 무능하고, 그로 인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기술의 급속 한 발전 속도를 정신적·도덕적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 로 인해 인간 소외와 내면의 황폐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익 추 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에서는 결국 인간성도 사랑도 계산과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내용성’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세상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모든 세대는 언제나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길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지 않는 혼돈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야 가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대로 살게 된다. 그것은 분명 나의 삶이 아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내 사고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나를 바꿀 수는 있다. 그래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바뀐다. 그것만이 세상의 고정관념을 다른 각도로 보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한 변화이고, 나의 삶을 찾아줄 것이다. 어차피 삶에 불변의 공식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