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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이 봐야 할 월미도 원주민 귀향 근거들

[뉴스하다] 폭력적인 인천상륙작전 재연과 한 맺힌 월미도 원주민들

by 뉴스하다

지난 15일 한쪽에선 시민 세금을 들여 전쟁을 미화하고, 다른 한쪽에선 전쟁 피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행사가 동시에 펼쳐졌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기념해 내항 8부두에서 재연행사를 열었다. 해군 함대와 해병대 상륙장갑차, 헬기, K9 자주포 등 군사용 무기 수십 대가 등장한 전승행사였다.


같은 날, 월미도 원주민들은 행사장 입구에서 한국전쟁 당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재연했다.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구성원들은 갯벌 흙을 바르고 귀향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인천시가 매년 기념하는 인천상륙작전. 그 이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감춰진 진실이 있다.


당시 그 땅에 살았던 월미도 원주민들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은 전쟁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휴전 이후 미군이 고향 땅을 차지해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라는 증거자료를 제출했음에도 미군에 이어 우리나라 군대가 들어오면서 귀향하지 못했다.


최근 대통령실은 인천시와 국방부에 이 사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원주민들은 75년 간 풀리지 않던 귀향 문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뉴스하다는 원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또 귀향을 위해 모은 사료와 그 실마리가 될 기록들을 취재해 공개한다.


월미도 원주민들의 조선시대 호적 제적부

원주민들이 조상부터 대를 이어 월미도에 거주했다는 근거는 조선시대 호적 제적부에 남아있다.


이 제적부에는 일제강점기 이전 월미도에 터를 잡았던 주민들의 본적과 호주(戶主), 이름, 가족관계, 생년월일 등을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겼다.

20250924_134909405.jpg?resize=741%2C1024&ssl=1 월미도 원주민 김흥보 씨 제적부.


20250924_134940497.jpg?resize=719%2C1024&ssl=1 월미도 원주민 차준보 씨 제적부.


위 문서는 당시 인천부 만석동 79번지에서 출생한 원주민들의 제적부다.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는 김흥보 씨의 제적부(상단) 기록을 근거로 1843년 이전부터 주민들이 월미도에 실거주했다고 보고 있다.


차준보 씨가 호주인 제적부(하단)에는 장남 차동근 씨 이름을 기재했는데, 이 이름은 1936년 일제가 작성한 월미도 조선인 마을 거주자 명단에도 포함됐다.


작성 시기가 다른 두 문서를 통해 원주민들이 대를 이어 월미도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일제에 의한 토지 조사

월미도 원주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 강제 이주 당했다.


1차 이주는 1904년 8월에서 1905년 사이 일본 군사기지 건립을 위해 약 50가구 주민들이 북성동 77~82로 옮겨갔다. 주민들이 거주했던 토지가 국유화되기 전이다.


일제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를 시작해 토지 소유권이 미흡한 땅을 국유화한다. 주민들이 1918년 2차 이주 당한 북성동 88~90도 일제 토지조사로 1914년 국유재산이 된 땅이었다.


1942년 4월 3차 강제이주가 이뤄지기 전 일제가 작성한 문서에는 당시 지번은 만석마을 77, 78, 79, 80, 81, 82 등에 거주한 주민들의 이름이 있다.

20250924_%ED%86%A0%EC%A7%80%EC%A1%B0%EC%82%AC2-%ED%8E%B8%EC%A7%91.jpg?resize=800%2C567&ssl=1 1936년 경성세무감독국 토지조사 문서. 조사대상인 만석마을 지번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에는 일왕 쇼와 11년(1936년) 10월 7일이라는 날짜와 경성세무감독국(왼쪽 하단)이라는 출처가 기재됐다. 인천 만석마을 월미도공원 내 무단거주자 이동 방안에 대해 썼다. 1942년 월미도 원주민 3차 강제이주를 앞두고 작성된 문서로, 강제이주 명분을 만들기 위한 현황 조사로 보인다.

20250924_%ED%86%A0%EC%A7%80%EC%A1%B0%EC%82%AC5-horz.jpg?resize=800%2C393&ssl=1 1936년 경성세무감독국 토지조사 문서의 조선인마을 소유현황.


20250924_%ED%86%A0%EC%A7%80%EC%A1%B0%EC%82%AC3.jpg?resize=714%2C1024&ssl=1 1936년 경성세무감독국 토지조사 문서의 조선인마을 소유현황.


당시 일제가 작성한 조선인 마을 거주명단에는 가옥번호와 토지지번, 건물평수, 용도, 소유자, 건물의 구조 등이 쓰여있다.


1963년 만석동장이 발급한 거주 확인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1963년 인천시 만석동에 거주 확인서를 제출했다.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거주했던 땅의 권리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20250924_155917265.jpg?resize=800%2C635&ssl=1 월미도 원주민들이 1963년 인천시 만석동에 제출한 거주 확인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만석동에 제출한 거주 확인서에 본적과 전 주소를 썼다. 지번은 만석동 86, 90, 97 등이 보인다. 월미도는 현재 중구 북성동이지만 당시에는 만석동에 속했다.

20250924_160008680.jpg?resize=800%2C613&ssl=1 월미도 원주민들이 1963년 인천시 만석동에 제출한 거주 확인서.


거주확인서에는 ‘위 사람들은 월미도에 거주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기에 확인해달라’는 내용이 써있다. 원주민들이 각각 날인을 했다.

20250924_160018109.jpg?resize=790%2C1024&ssl=1 월미도 원주민들이 1963년 인천시 만석동에 제출한 거주 확인서에 만석동장의 직인이 찍혀있다.


만석동사무소는 1963년 3월 25일 월미도 원주민들이 제출한 거주 확인서를 접수했고, 같은 날 만석동장이 직인을 찍었다.


이렇게 거주확인 되면 해당 주소로 이주 후 등기를 하고 소유권을 인정받는 것이 수순이었으나, 원주민들은 거주사실을 인정 받고도 미군 주둔으로 인해 주거지를 옮길 수 없었다.


미군과 국방부가 강제로 앗아간 땅의 인계 문서

국방부는 1971년 세운 월미도 군기지 통합계획에 따라 미 항만 사령부 부지의 국유재산과 징발재산을 주한 미군에게 인계 받았다.


국방부장관이 1973년 1월 5일 해군 참모 총장에게 보낸 ‘주류군 재산 보관환’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재산목록과 수수증, 도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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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들이 거주했던 월미도 땅도 인계문서의 재산 목록에 올랐다. 토지 징발일자는 1951년 3월 1일이다.


징발토지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가 있을 때 군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둔 땅이다. 월미도 일대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군 주둔으로 인해 징발됐다.


일반적인 징발토지는 전후 징발재산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에 따라 원소유자에게 보상했다. 그러나 월미도 원주민의 땅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국유지로 등록됐다는 이유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소관청 불명의 재산 빼앗은 국방부

국방부 산하 해군본부는 월미도에 부대를 주둔시킨 뒤 1974년 4월 24일 원주민 땅을 강제로 빼앗는다.


인천상륙작전 민간 폭격으로 떠나야만 했던 월미도 원주민 땅임에도, 불명의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군본부는 부동산 등기해 원주민들의 소유권을 앗아갔다.


당시 해군본부가 빼앗은 땅은 인천시 중구 북성동1가(월미도) 79~102까지 총 15필지, 8천19평이다. 이 때문에 월미도 원주민들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방부는 이 부동산 등기를 이유로 들어 소유권을 월미도 원주민에게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열강이 빼앗아간 문화재의 소유권이 우리나라에 있음에도 돌려받지 못하는 꼴과 다를 게 없다.

20250925_162731726.jpg?resize=741%2C1024&ssl=1 1974년 소관청 불명재산을 보존등기 했다는 내용의 해군본부 문서.


20250925_162745188.jpg?resize=753%2C1024&ssl=1 1974년 소관청 불명재산을 보존등기 했다는 내용의 해군본부 문서.


진실화해위원회 권고 결정

행정안전부가 2019년 인천시에 보낸 공문을 보면 진실화해위원회는 ‘생존한 월미도 원주민들은 간절히 귀향을 원하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고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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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가 인천시에 보낸 공문. 진실화해조정위원회는 월미도 원주민들이 원하는대로 귀향해줄 것을 권고했다.


이는 2008년 3월 1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결정에 따른 판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월미도 주민들은 거주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의 핵심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며 “그 후에도 월미도가 군사기지로 되면서 유족과 거주민은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홍봄 기자 spring@newshada.org

이창호 기자 ych23@newshada.org

자료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기사보기〉

https://newshada.org/3956/

〈영상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XWEM0hQ0m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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