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26
유난히 춥고 외롭던 2월과 3월을 지나 봄을 맞이해 입게 될 옷을 꺼내기 위해 옷장을 정리하듯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둘씩 꺼내보곤 한다. 주변에서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느냐고 물어도 그런가?라고 말하면서 쉽게 공감하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되돌려보면, 바쁘게 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려 했던 이유가 가장 크다고 느낀다. 쉬는 날 없이 월화수목금토일 모두 일을 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고, 누군가에겐 대단한 일이며, 누군가에겐 걱정이 되는 일이고 또 어느 누군가에겐 전혀 관심 없는 일이 되기도 하듯 같은 사실에 대해서 모두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건 나의 생각과 감정들에 대한 부분도 있겠지만, 나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생각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은 나를 100% 이해할 수 없다'라는 글을 보고 난 후 다른 이들의 상황과 생각을 100% 이해할 수 없으니 상대방 또한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싶은 마음이 가장 먼저 생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황에 대해서 더 이해하려고 하기보단 그냥 나와는 다르구나 생각하기 바빴다. 그렇게 이해하려는 마음을 자꾸 외면하다 보니 가깝게 느껴지던 주변 사람들이 나와 한걸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이들의 상황이나 생각에 공감하고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까지 외면하기 바빴다는 사실이다. 사실 난 지금 힘들고, 지치고,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만큼 불편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가능하고,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내 마음의 소리와 감정들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를 마주하는 이들의 진심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까지 외면하려는 걸까.
첫 번째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면서 스케줄에 치여 살고 있는 내가 힘들다고 인정을 해버리면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현실이 참담할 거 같아서. 힘들지 않고 잘 해낼 수 있다고 나 스스로를 믿는다기 보단 힘들다는 생각 자체를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힘들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바빴다. 그들은 나를 100%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내가 나를 과대평가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정도 조차 못 버틸 리가 없어'라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아닌 괜한 자존심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괜찮아 조금 힘들면 쉬어가도 돼'라고 왜 말해주지 못했을까. 조금 더디게 흘러가도 괜찮지 않았을까. 왜 '잘할 수 있어'가 아니라 '못 하면 안 돼'라고 생각을 했던 걸까. 스스로를 검열하고 반성하는 건 좋을 일이지만,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기준이 높아져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책으로 이어졌던 거 같다.
외면이라고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는 방어기제로 쓰인다고 하는데,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행위지만 외면을 자꾸 하다 보면 외면했던 모든 상황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곤 하는 경험들을 자주 겪는다. 오늘 해야 하는 공부를 미루면 해야 하는 양이 2배가 되듯, 생각이나 감정들도 필요할 때 정리하고 해소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과 고통을 동반한다. 외면의 순기능적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
축구경기는 전반과 후반 사이에 쉬는 시간이 존재한다. 외면이 잠깐 쉬어가서 더 나은 후반전을 준비할 수 있는 쉬는 시간 같은 도움닫기가 된다면 참 좋겠다.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장점이 될 수도 있듯이 후반전을 뛰어야 하는 시간까지만 타이밍에 맞게 돌아온다면 어쩌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거 같다. 감정과 생각이 복잡할수록 그쪽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조금 더 차분해질 수 있도록 잠깐의 쉬어가는 타이밍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령이 아닐까.
외면이란 잠깐 쉬어가지만 예외 없이 다시금 나를 마주 봐야 하는 과정이라 말하고 싶다. 결국 어떤 감정이든 상황이든 모른 척한다고 해서 계속 피할 수 없다. 외면으로 인한 무뎌짐 끝에 오는 추억을 느낄 수 있는 향수가 아니라 후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