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37
"결국 사랑은 타이밍이다. 내가 승희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 보단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게 운명이고 인연인 거다"
얼마 전 보았던 '너의 결혼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 순간 놓치고 있던 문장을 영화를 통해서 다시 새겨볼 수 있었다. 혹시라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미 결정되어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타이밍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운명은 정해지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타이밍은 꽤나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사실은 굉장히 친한 친구여서 장난도 치고, 많이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생겨서 혼자 끙끙 앓기 시작했다. 이미 친한 친구여서 잘못하면 친구로 지내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다가 마음을 정리하려고 그 친구를 꽤나 오랫동안 피하면서 지냈으나, 매일 학교에서 본다는 건 그만큼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의미 었다. 어느 순간 또다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계속 친구로 지낼지.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 친구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아서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할 말이 있다고 동네 카페로 불러놓고는 30분 동안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살면서 지금까지 가슴이 그렇게 뛰어본 적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속 마음을 꺼내기는 참 어려웠다. 그만큼 차이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그 친구와 관계가 참 소중했다. 참 고맙게도, 그 친구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나중에 돼서야 알 게 되었다. 그렇게 고3 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학교 때부터 하고 있던 비보이를 그만두고 무얼 해야 할지 방황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여자 친구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과 진로에 대해서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난 공부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고 주말마다 서울에 참 많이도 갔다. 남산에 가서 자물쇠도 걸어두고, 여의도에 벚꽃을 보러 다니고, 뮤지컬이나 공연도 꽤 많이 보곤 했다.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평일에 몰래몰래 물류센터 알바를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그랬던 나 자신이 후회스럽거나 원망스럽지 않다.
그렇게 수능을 치르게 되었고, 결과는 불 보듯 뻔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는 원하는 학과에 합격을 했고, 나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잠시나마 재수를 해볼까 생각도 하기도 했고, 지방에 있는 성적을 별로 안보는 곳으로 일단 지원할까 싶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대학을 미루고 그 당시 군대를 빨리 가고 싶어 하는 친구와 동반입대를 하게 되었다. 102 보충대에 도착해서 이제 들어가야 한다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내가 눈물이 이렇게나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훈련소에서는 전화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여자 친구에게 틈틈이 편지를 썼다. 자는 시간에 몰래 쓰다가 기합을 받기도 하고, 기상시간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편지를 쓰고, 주말마다 가는 종교활동에 가서도 몰래 편지를 썼다. 그랬던 것과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를 배치받아서 전화를 할 수 있었고, 부모님께 안부전화드리곤 바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연결이 되어서도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없었다.
첫 휴가를 나와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고, 마음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정말 힘들었다. 휴가기간 동안 매일 술을 마셨고, 복귀를 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이야기를 해야 했던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변해버린 여자 친구를 원망했지만, 군대에 가지 않고 대학에 가서 더 자주 만나고 연락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시작에도 해당되지만, 끝을 말하는 과정에서도 존재했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에 군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만나고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결과 또한 뒤집을 수 없었다. 살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생각보다 많았으며, 힘들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꽤 지낼만했다. 애석하게도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했다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상을 살아야 했다.
첫사랑에 실패했다면 '너의 결혼식'을 보고 공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짝사랑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은 좋은 순간이 찾아왔고 용기를 내어 내 마음을 표현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나의 결정이 적절한 시기에 일어난 판단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저 그 당시에 꼭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했을 뿐이다.
감사한 마음도 시간이 지나서 표현하면 감정이 희석될 뿐이고, 미안함을 표현할 때도 시간이 다 지나서 사과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음식에도 유통기한이 있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정해져 있다.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분명 알맞은 시기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시기를 놓치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어야 하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릴 수 없듯 타이밍은 참 중요하다.
마음이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은 분명 존재한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상황이든, 끝맺음을 이야기하는 상황이든 가장 적절한 타이밍은 분명 있다. 그 시기를 놓쳐버리면 결과도 자연스레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설령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타이밍이 최고가 아닐지라도 행동하고 표현해야 한다. 최고의 타이밍은 그 당시에는 절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켜봤을 때 알 수 있으니, 스스로를 믿어야 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정말 늦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
"우리는 시간에 살고 시간에 죽어. 그래서 시간의 실수를 하면 안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