쑬딴스북
쑬딴 작가와 탄이 옆에 나는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15분이 흐르고 서로 말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개와 술' 책을 이야기하며 대화식 서평을 썼다 말했다. 내심 기억해 주리라 생각했다. 쑬딴 작가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 같았다. 일 년도 넘은 일이라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서평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인사한 사이에서 대화를 시작한 사이가 되었다.
탄이는 애타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때 쑬딴 작가는 나에게 말했다. "탄이가 빵을 먹고 싶어 그럽니다" 나는 아내가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거기에는 좀 전에 시킨 크로와상이 있었다. 탄이는 크로와상의 냄새를 맡고는 먹고 싶어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크로와상을 탄이를 주고 싶었으나 해서는 안될 일이라 판단했다. "탄이야!, 다음에 맛있는 간식 사가지고 올게"
쑬딴 작가와 나는 글 쓰는 것에 대한 어려움, 출판, 그리고 탄이 이야기에 대한 대화를 하였다. 같은 북카페를 하고 글쓰기와 독서가 취미인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모처럼 주변인에 지친 나에게 그와의 대화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이제 쑬딴 작가와 지인들이 함께 공저한 '오늘 같은 날 헤이리'의 서평을 시작해 보겠다.
쑬딴 작가가 책방을 운영하면서 '진상' 손님을 가끔 만난다고 한다. 음식점보다는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몇몇 스트레스 유발자인 진상들의 행동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한다. 나도 자영업자라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진상들은 만나기 때문이다.
"작가님은 어떤 진상 손님들이 있으셨나요?"
나의 물음에 쑬딴 작가는 말했다.
"여러 '진상' 손님이 있었죠"
"그중 제일 '진상' 손님이 생각나네요"
그는 온화한 표정이 잠시 어두워진다.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인가 보다.
"한 가족이 책방에 들어왔어요, 그때 저는 매장 한구석 쪽에 앉자 있었어요"
"남편은 밖에 있고 , 엄마와 아이들이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가는 거예요"
"그때까지 손님이 왔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그런데 이상했어요. 아이들 손에는 다른 가계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어요"
"엄마는 아이들이 일 보는 것을 마칠 때까지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아빠는 밖에서 담배를 폈죠"
"순간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아빠 다 먹었어.'라고 말하자 '그럼 이제 가자'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떠난 후 테이블 위에는 아이스크림의 종이 쓰레기와 얼룩이 보였죠"
"저는 한동안 그 쓰레기를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진상손님이 생각났다.
"자영업을 하면 진상 손님은 누구나 있죠"
"저에게도 한 달에 6번 정도는 진상손님들을 만납니다"
쑬딴 작가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우리 가계 진상손님들은 주로 출장을 가서 생긴답니다"
"한 번은 제가 전화를 받고 출장을 갔습니다"
"손님집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울리더군요"
"이때 느낌이 옵니다"
"문이 열렸다며 취소하는 전화죠"
"저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렸다며 취소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 왔으니 올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올라가서 저는 그에게 출장비를 달라고 했습니다"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출장비냐며 따지죠"
"나는 당신이 불렀고 지금 내가 여기 왔는데 왜 한일이 없냐고 말하죠"
"하지만 그에게 내 논리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실랑이를 했죠"
"마지못해 그는 오천 원을 내밀며 말합니다"
"이거 가져가려면 가져가고,,,"
"저는 하는 수없이 그거라도 가져갔습니다"
쑬딴 작가는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나는 말했다.
"그러게요, 매장에서 손에 들려있는 오천 원을 보면서 자괴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당하고 나니 생각이 틀려졌어요"
"물론 책을 읽고 제 성격이 변해서도 그렇지만요"
"한 번은 똑같은 일이 생겼죠"
"문을 열러 갔는데 손님은 없었어요"
"저는 전화를 걸었죠, 그녀는 아직 도착을 안 했다고 했죠"
"도착도 안 한 상태에서 저를 부른 거예요"
"그래서 저는 도착하면 전화 달라고 했죠"
"다시 매장으로 갔어요, 두 시간 후 그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영업을 하다 보면 느는 건 촉인가 봅니다"
"아니다 다를까? 취소 전화였어요. 열었으니 오지 말라고,,"
"전 출장비를 달라고 했죠"
"얼마냐 묻길래, 삼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역시나 그녀의 입에서도 늘 듣던 말이 하더군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출장비 나며,,,"
"저도 늘 같은 말을 합니다"
"왜? 한 게 없나요? 내 시간을 내서 집에 방문드렸잖아요"
"여기서부터는 한동안 돌림표예요"
"우린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말하죠."
"서울에서 택시를 타도 삼만 원은 안 나와요"
"그리고 같은 동네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순간 저는 욱했죠"
"그렇게 비교하시면 저도 말할게요"
"골프레슨 20분에 오만 원 받아요, 제가 손님집에 왔다 갔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40분을 허비했으니 10만 원 주실래요?"
"그리고 그쪽 동네의 편의점은 다른 동네 편의점보다 싸나요?"
"내 말에 그녀는 딜을 합니다"
"그래도 삼만 원은 너무 비싸요, 일만 원만 받으세요"
"전 그녀에게 단호히 말했습니다"
"손님은 삼만 원을 주기 싫은 거죠?"
"그러자 그녀는 주기 싫은 건 아닌데... 너무 비싸요"
"저는 그녀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손님의 40분 시간의 가치는 일만 원 일지는 몰라도, 제가 손님에게 쓴 40분의 시간의 가치는 삼만 원입니다"
"제 가치를 손님이 정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쑬딴 작가는 말한다.
"그럼 그걸로 끝이에요?"
나는 아직 안 끝났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30분 후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죠"
"저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입금해 드릴 테니 계좌번호 찍어주세요"
"저도 그녀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 됐습니다"
쑬딴 작가는 말했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나는 쑬딴 작가에게 말했다.
"그녀 이후 종종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저는 제 시간의 가치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 이해하는 분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해를 하고 저의 가치에 대해 인정해 주더군요"
쑬딴 작가는 말했다.
"저는 시원님처럼 손님에게 그렇게까지는 말을 못 해요"
"그래서 저는 화장실 표시를 떼어버리고 남자 화장실은 '기계실'로 여자 화장실은 '창고'라고 써붙여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니 진상 손님이 현저히 줄더군요"
"막무가내로 화장실을 찾다가 기계실에 볼일을 볼 수 없잖아요"
그는 자신의 생각한 기발한 방법이 흐뭇해 했다.
유상현 헤이리 사무국장
헤이리 마을에는 사무국장이 존재한다. 마을 전체가 예술 마을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규정과 규칙이 존재하며 마을 구성원들은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 그래서 마을 운영을 담당해야 하고, 그 역할을 유상현 헤이리 사무국장이 맡고 있다.
사무국장의 직함이라면 헤이리 마을이 왜? 하필 파주에 들어왔는지 궁금했다.
"국장님 헤이리 마을은 어떻게 예술마을이 되었나요?"
유상현은 말한다.
"IMF 외환위기 직후,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살지 않던 파주 접경지대에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수백 명이 예술인들이죠"
"정부 도움 없이 오로지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지금의 헤이리 마을입니다"
"15만 평 부지를 매입해 단지를 설계하고 도로도 직접 깔고 황량한 허허벌판에 전기, 수도, 가스도 직접 끌어왔죠"
"초기 자금만 해도 대략 685억 원에 이르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 미친 짓을 수백 명의 예술인이 동참한 거죠"
"지금이라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13년 전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1박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집은 특이하게도 2층 뒷 베란다가 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지은 집이었다. 덕분에 그 집은 그해 건축디자인상을 받았다. 집주인은 교수생활을 하다 퇴직한 노부부였는데 , 한마디로 한국의 영국신사 같은 느낌이랄까?.... 온화한 표정에 기품이 넘쳐흘렀다. 지금도 헤이리 마을에 가면 13년 전 숙박한 그 집을 둘러보고 간다.
그 당시 헤이리 마을은 예술 마을 그 차체였다. 갤러리와 공방 그리고 문화공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80개가 넘는 카페와 소품을 파는 가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빼곡히 들어찬 건물도 예술마을에 대한 이미지를 상쇄시켰다.
헤이리 동화 나라 대표 정병규는 말한다.
"네 곳이던 책방은 두 곳으로 줄었습니다"
"꾸준히 작품전을 열어가며 마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몫을 하던 갤러리들도 몇 곳이 안 남았습니다"
"대신 카페와 빵집, 의류등 사업장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이유는 처음 공간을 열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 유지에 들어가는 여러 비용을 소액 입장료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지쳐가고 다른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이죠"
"예술마을을 추구하던 당시 선구자들은 지금 거의 70대의 노인이 되어 일을 활기차게 하기 힘들어진 것도 하나의 요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헤이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단한 일상에 숨어있는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저의 세대는 다 지났습니다"
"좀 더 공손하게, 머리는 앞을 바라보지만 허리를 굽히며, 사람을 맞으며 이 마을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상현 사무장은 말한다.
"세상이 변할수록 '모두 함께' 멋진 마을을 만들어 보자던 초기의 '집단의 낭만'이 '나 혼자' 멋진 내 공간을 만들겠다는 ' 개인적 낭만'으로 바뀌어 갑니다."
"헤이리 마을도 세상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죠"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여도 그 안에서 타협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법이죠"
"헤이리 마을에서는 첫째 예술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둘째로 이웃을 배려하고 나의 욕심을 양보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수백 명의 예술인이 '미친 짓'으로 탄생한 헤이리 마을은 '문화지구'로 공인받은 그 가치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친 짓'으로 만든 '문화지구'에서 살거나 영업하려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상식은 접어 두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만 꺼내 두시길..."
"당신의 양보와 배려가 빛을 발휘하도록 사무국도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도 13년 전 내가 만난 노부부처럼 헤이리 예술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도예작가 장민자는 말한다.
"헤이리란 말은 이곳 파주 지역에서 전해오는 전래 농요인' 헤이리소리'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저는 이제 인생의 2막을 위해 삶의 터전은 헤이리 마을 이곳에서 동행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늘 그러합니다"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다면 오르는 길도 있습니다"
"여기 삶도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저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지키고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헤이리와 동행을 선택하고 함께한 나의 시간들은 조금씩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조형예술가 성낙중은 말한다.
"예술이 그러하듯 '헤이리'라는 공간을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어요"
"'헤이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다양한 예술적인 영감과 표현의 실현을, 또 누군가는 편안한 안식과 힐링을 주는 공간으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는 공간이 바로 '헤이리예술마을'입니다."
"꿈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
"헤이리가 내게 안겨준 따뜻한 정을 나는 기억합니다"
"이곳 헤이리에서 제가 느꼈던 따뜻한 사랑을 또 다른 내가 함께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처럼 헤이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헤이리 예술 마을은 앞으로 더 찬란히 발전할 거라 믿는다. 끝으로 쑬딴스 북카페 화장실에 "방광이 비워졌으니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채우세요"라는 조금은 뻔뻔한 작가가 되시길 바라며 '오늘 같은 날 헤이리'의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