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말, 나는 출장일을 하고 매장문을 열었다. 무언가 떨어지며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그 소리가 이끄는 곳에 머물렀다. 바닥에는 흰색 카드 명세서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카드 명세서를 놓고 흐르는 땀을 씻기 위해 싱크대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나왔다. 흐르는 물을 손에 가져가 보았다. 시원했다. 나는 두 손을 포개어 이미 땀으로 찌든 얼굴과 목을 여러 번 씻었다.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종이컵에 담아 마셨다. 입안에서 목안으로 그리고 식도로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시원함이었다. 이 시원함은 습한 여름날 땀 흘러 일한 것에 보상 같았다. 오늘처럼 물에게 고마운 적도 없었다. 이제야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테이블 위에 놓인 명세서....
나는 명세서 봉투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8월 이용대금 명세서라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명세서를 열어본 순간 내 눈에 스친 숫자.... 나는 그 숫자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인식을 거부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명세서를 뚫을 기세로 쳐다보았다. '3,549,702원'
그 숫자들은 안경너머의 내 눈동자를 심하게 흔들리게 하였다. 그 덕분인지 천장에 매달린 정지된 실링팬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까지 시원한 물이 준 고마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나의 모든 빛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월 카드 지출은 많아야 50만 원 내외다. 주로 현금을 쓰는 편이다. 내가 카드 결제를 안 하는 이유는 과소비를 일으켜 나중에 결제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매장을 운영한 지 20년이 넘게 그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 내 눈에 비친 '3,549,702'라는 숫자는 요즘 유행하는 멀티버스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명세서 일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명세서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카드를 쓴 내역은 확인해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명세서를 펼쳤다. 명세서 뒷면에 빼곡히 쓰인 40개의 내역들이 보였다. 그것에 나는 놀랐고, 그 내역 대부분이 쿠팡이어서 호기롭게 외치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뒤로 넘어갈 뻔하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두 달 전 조카가 산에서 에어팟을 잃어버린 날 옆에 있던 딸아이가 자기도 사달라며 쿠팡 와우회원으로 가입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고작 몇천 원 싸게 산다고 가입했던 와우회원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로 가입한 건 아니었다. 쿠팡 와우회원은 한 달간 무료 이용이 가능했고, 에어팟을 사고 바로 해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언제든 나의 귀차니즘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한 달간 와우회원의 무료이용은 유료로 전환되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지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사태의 주범이 될 수는 없었다.
7월 초 아들의 학교 준비물을 미처 사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 딸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쿠팡 와우 회원 해지했어?"
그 고요한 한마디가 태풍을 불러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와우회원의 특권인 새벽 무료 배송으로 아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문 앞에는 나의 이른 출근보다 빠른 새벽 배송으로 전날에 산 물건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신세계를 오감으로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아내가 저녁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간다고 할 때마다 호기롭게 외쳤다.
"나 와우 회원이야, 내가 시켜 줄게, 뭣하러 나가니" 라며 자신 있게 휴대폰을 켜며 주문을 하고 결제했었다. 매일 나보다 빠른 배송에 뿌듯해하며 출근해던 나였었다. 그랬던 나는 지금 30개가 넘는 쿠팡의 내역서를 보며 아내에게 조용히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여보, 당신의 살림살이는 나아졌을까?"
나는 일했던 땀보다 많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외계에서 날라온 카드명세서는 김치남을 만들었고 경외로운 배송으로 환희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지나지 않아 소리없는 절규와 절망을 주었다. 이것이 끝은 아닐것이다. 나는 외계에서 날라온 카드명세서를 아니 그속에 남아있는 숫자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