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영업자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열쇠도매상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매장을 열고
늦은 밤에야 문을 닫았다.
그리고 80을 바라보던 여섯 해 전,
그는 조용히 일을 놓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대단한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부끄러워했다.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업’을 쓰는 란에
나는 “상업”이라 적었다.
열쇠업이라는 말이 왠지 낯뜨겁고,
친구들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교실 어딘가에서 “네 아빠는 뭐 하시니?”라는 말이 들려오면
숨고 싶었다.
그 시절, 직업엔 분명히 귀천이 있었다.
지금도 ‘열쇠공’이라 부르지만,
그땐 더 험한 말도 있었다.
쇠를 만지는 사람이라 하여 ‘쇳대’.
말끝마다 냉소가 묻어 있었고,
시선엔 선입견이 가득했다.
지금은 기계를 사용해 쉽게 열쇠를 복사하지만,
아버지는 손으로 열쇠를 깎았다.
‘줄’이라 불리는 야스리로 하나하나 홈을 파고,
수십 번 문지르고 다듬어야 겨우 하나 완성되었다.
그렇게 만든 열쇠로 누군가의 문이 열리고,
하루가 흘러갔다.
나는 그 모습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23년째 열쇠를 팔고 있다.
그날의 간판 아래,
아버지처럼 나도 서 있다.
내가 열쇠업을 시작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사실,
그 당시엔 ‘명확한 꿈’이 없었다.
한때 농협 채용공고에 도전했었다.
수학과 전산을 복수전공한 덕에
서류는 어렵지 않게 통과했고,
시험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연봉이 1,300만 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 무렵,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도 열쇠 일 한번 해볼래?”
남대문 매장에서 사촌형에게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간에 교수님 지인의 제약회사 면접도 보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용인 수지에 작은 간판을 내걸었다.
열쇠 도매상.
그때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대학생 시절,
가끔 아버지나 형님이 일이 생기면
내가 매장을 봐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이 일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익숙함은 곧 안도감을 주었고,
그게 내가 열쇠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막상 혼자 매장을 운영해보니
세상에 쉬운 자영업은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재고는 엉망이 되고,
하루만 손을 놓아도 매출이 휘청였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손님 한 명 없는 날이 있었고,
반대로
점심도 거르며 열쇠를 깎아야 했던 날도 있었다.
이 일이 내 천직일까?
아버지처럼 잘 해낼 수 있을까?
수없이 되묻던 그 질문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지금은 그냥
‘살아내고 있다’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어느 날,
열쇠를 맡기러 온 친한 동생이 말했다.
“형님은 기술자잖아요. 자부심 가지셔야죠.”
그 한마디에 울컥했다.
그 말이,
어떤 칭찬보다 나를 위로했다.
지금의 열쇠업은 많이 달라졌다.
디지털 도어락이 일상이 되었고,
기계가 열쇠를 깎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열쇠공을 ‘단순노무자’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은,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문을 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간판 아래에서 하루를 연다.
그리고
누군가의 하루도 함께 연다.
그날의 간판 아래,
아버지의 발자국 위에
나의 그림자가 포개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