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 생존기
열쇠 도매업 특성상 구색을 맞춰야 한다. 구색이라면 생소한 단어이지만 자영업 특히 도매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한마디로 없는 것이 없어야 한다. 나는 열쇠업을 하기 때문에 모든 열쇠를 다 갖춰야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추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지역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이 아파트인지 주택단지인지 아니면 더 오래된 건물이 있는지에 따라 열쇠 종류가 변한다. 내가 2000년에 수지에 올 때만 해도 아파트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 주변에 막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오래된 주택과 다세대빌라 그리고 아파트에서 사용하는 열쇠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구색은 명관이었다.
용인시는 수지를 시작해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죽전 그다음 마북동을 시작해 동백까지 대규모 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존 오래된 주택과 다세대 빌라들은 허물어지고, 그 공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열쇠의 종류가 점점 아파트 열쇠로 변해갔다. 그리고 아파트 열쇠도 일반 수동 키 열쇠에서 번호로 누르는 디지털 도어록이 점점 상용화되면서 구색은 재고로 변해갔다.
아파트 단지가 늘어날수록 발 빠른 재고 처분을 위해 나의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처분할 재품의 원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언제 나갈지도 모를 재고를 처분하기보다는 쌓아두고 기다리길 선택한 자영업자의 숙명 같은 거랄까? 나 역시 그쪽을 택했다. 재고 중 절반은 1년에 한 번도 팔지 못했다.
열쇠업의 재고의 재품은 주로 수동으로 작동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합금이나 철의 재질로 되어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악성 재고들은 고철로 고물상에 판다. 이때 악성 재고의 판매 가격은 사 올 때의 5%의 가격이다. 예를 들어 1000만 원의 악성재고를 고철로 팔면 5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순수 철의 가격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신주라는 합금을 포함한 가격이다. 그러니 악성 재고를 원가의 10%로 판매해도 마지못해 고철로 판매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런 악성 재고들은 구색을 중요시하는 도매업 특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손님이 열쇠 키를 복사하러 매장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 재료는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님에게 3일 후 오라고 하고 나는 공장에 주문을 한다. 이때 손님이 필요한 건 1개이지만 공장에서는 묶음으로 팔기 때문에 나는 100개를 사야 한다. 그러니 나머지 99개는 언제 나갈지도 모를 악성 재고로 변한다.
재고는 언제나 재고로 남는다. 다만 일반에서 악성으로 변할 뿐이다. 주변 환경이 변하면 열쇠업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3년 전 나는 구색을 포기하고 악성 재고 3분의 1을 고철로 팔았다. 그리고 악성 재고가 있던 자리에 카페를 만들었다. 이제 나에게 구색은 명관?이라는 말은 옛말이다. 구색을 포기하니 내가 꿈꾸던 카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