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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를 내려놓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를 안았다

나는 자영업자입니다.

by 시원시원

나는 열쇠를 다루는 일을 한다. 문을 열고, 닫고, 때로는 잠긴 마음까지 풀어주는 일이다. 누군가의 집 앞에서, 상가 입구에서, 나는 늘 손에 드라이버를 들고 사람들의 일상과 마주한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이십 년을 넘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의 문은 잘도 열면서 정작 내 안의 문은 닫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사는 하루가 너무 익숙해서 숨이 막혔다. 똑같은 작업,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찾아왔다. 어른의 사춘기.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중년의 요동. 잘 살아왔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하나둘 후회로 바뀌고, 잊고 있던 외로움이 문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독서였다. 매장 한편에 책을 한 권 놓고, 일과 중 짬이 날 때마다 몇 줄씩 읽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매장의 절반을 북카페로 바꾸기로 했다. 열쇠와 책이 공존하는 공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생소한 조합이었다.


북카페1.jpg


그 시점에 15년 지기 친구 A가 찾아왔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북카페 쪽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책은 무슨. 너랑 독서 안 어울려. 그냥 하던 대로 해.”

말투는 가볍지만, 마음엔 무거운 돌을 던졌다. A는 매장 구조를 바꾸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했다.

“일주일도 못 가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 뻔한데 뭐 하러 정리하냐.”

그의 말은 익숙했고, 심지어 설득력도 있었다. 나를 오래 지켜본 사람의 단정적인 말은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정리하고, 가구를 옮기고, 책장을 들였다.


A는 왜 그렇게 내가 변하는 걸 불편해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변해가는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예전의, 자신이 알고 있는 나를 좋아했고, 거기에서 벗어나길 원하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다르게 선택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북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던 어느 날, 나는 블로그에 독서모임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낯가림이 심한 내가 말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책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들은 격려와 응원은, 15년 지기 친구에게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그날 나는 느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작은 용기가 시너지를 만들고 있다는 걸. 그 변화는 조용했지만 깊었다. 익숙한 하루에서 벗어나 낯선 나날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오래된 나를 내려놓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를 안았다.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 그리고 달라진 나.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그게 나 같아졌다. 거울 속 표정이 달라졌고, 스스로에게도 “잘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건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열쇠다. 내 안의 문은 닫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 문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열어야 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문을 열고 걸어 나오고 있다. 여전히 열쇠를 다루는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이제는 다른 종류의 열쇠도 쥐고 있다. 마음을 여는 열쇠.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준, 작고 조용한 결심 하나.

익숙한 것을 떠난 자리엔, 조금 서늘하지만 분명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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