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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닭이에게 배우는 행복

나는 자영업자입니다.

by 시원시원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존재를 만난다.
검고 윤기 나는 깃털, 햇살 아래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수탉 한 마리.
나는 그를 ‘행닭’이라 부른다.
행복한 닭, 줄여서 행닭.


그 닭은 매번 산행 입구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고, 울타리도 없다.
마치 “이 산은 내 땅이다”는 듯 당당히 길을 누비는 모습에
나는 갇힌 닭들과는 전혀 다른 생기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햇살이 행닭의 깃에 머물면,
푸른빛이 물결처럼 번지고,
그 순간만큼은 묘하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분이 든다.


나는 행닭이에게 말을 건다.
"나 보려고 일찍 일어났구나?"
"그래, 오늘도 즐겁게 지내렴, 행닭아."


그 말은 사실 행닭이를 위한 말이라기보다
내 마음을 위한 주문 같은 것이었다.
행닭이에게 말을 걸고 나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진다.


어느 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길 한가운데를 천천히 걷고 있는 행닭이를 보았다.
그러다 자동차 한 대가 휙 지나갔다.
놀란 행닭이는 허둥지둥 산속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닭도
매일 이렇게 도망 다니며 살아야 하는구나.’


자전거에 놀라고,
아이들의 소리에 놀라고,
길고양이나 개가 나타나면 더욱 겁에 질려 숨어버리는 행닭.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내 시선이 너무 단편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행닭이의 자유는 어쩌면,
늘 위험과 불안과 맞바꾼 선택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흔히 말한다.
햇살 아래 졸고 있는 강아지를 보며,
“개 팔자가 상팔자네.”


하지만 우리는 그 강아지가
짧은 줄에 묶여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우리는 순간만을 본다.
그리고 그 단면으로 전체를 판단한다.


그 강아지가 진짜 행복한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가 보고 싶은 장면만 보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자신의 결핍으로 세상을 본다.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은 연인을 부러워하고,
여유 시간을 갖고 싶은 사람은 혼자인 이들을 부러워하며,
자유를 꿈꾸는 이들은 직업 없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는 좋겠다.”
“넌 행복하겠다.”


하지만 그 말은,
상대가 가진 한 장면을 보고,
내 부족함으로 만든 착각일지도 모른다.


행복은 어떤 형태도, 기준도 없다.

어떤 이는
비 오는 날 창밖을 보며 행복해하고,
어떤 이는
같은 풍경을 보며 외로워진다.


같은 상황, 같은 하루.
하지만 마음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진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우리에게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려운 눈으로 보면
세상은 두려운 곳이 되고,
따뜻한 눈으로 보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된다.


또 네빌 고다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구하는 자는 사랑의 결핍만을 만들 뿐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자만이 오직 사랑을 발견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늘 부족한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더 이상 찾지 않아도, 이미 그 안에 행복이 있다.


오늘도 산을 오르며 나는 행닭이를 떠올린다.
자유롭지만 때론 두려움 속에 사는,
행복해 보이지만 때로는 고단한 존재.


행닭이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나는 배운다.


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오늘도 내 마음이 행복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를 바라며
나는 또다시 산을 오른다.
그리고,
행닭이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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