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지금의 너도
3년 전, 나는 자타공인 '게으름 장인'이었다.
밤 12시까지 TV 앞을 지켰고,
아침 7시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운동이라곤 숨 쉬기, 의자에 앉기, 그리고 가끔 걷기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귀찮은 날엔
숨 쉬는 것조차 노력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술과 담배에는 흥미가 없었고,
음식에도 큰 욕심이 없어 살이 찌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근육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지방이 묵묵히 대신했다.
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서히, 아주 정성스럽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가끔 산책이라도 해보자고 권했다.
“그래, 한번 해볼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은 내 안에서 늘 이렇게 번역됐다.
‘지금은 좀 그렇고… 봄 되면 하지 뭐.’
그렇게 나는,
무려 3년 동안 봄을 기다렸다.
봄은 오지 않았고, 나도 나서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게으름뱅이였다.
게으름에도 꾸준함이 있었달까.
그 꾸준함 덕분에,
봄이 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산책을 시작하자 아주 조금,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독서를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해에는 100권의 책과 300편의 글,
두 번째 해에는 50권의 책과 100편의 글,
세 번째 해엔 30권의 책과 30편의 글을 썼다.
새해가 바뀔수록, 내 통계는 점점 단출해졌다.
읽은 책은 줄고, 쓴 글도 줄고,
기록된 숫자는 자꾸만 작아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생각은 더 깊어졌고,
글은 더 정제되어 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됐다.
머릿속은 풍요로웠지만, 손끝은 점점 멈춰갔다.
생각은 넘쳐났지만, 실행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강제성'을 부여하기로 하였다.
생각은 그저
‘머릿속에서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불과하지만,
그걸 눈으로 보이게 만들면
비로소 현실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그 방법.
단순하지만 강력한 주문인
‘노트에 하루 100번 쓰기’
의욕으로 가득했던 첫날.
“2023년, 책을 출간하여 월 천만 원을 벌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 문장을 하루 100번… 아니,
욕심을 보태 140번 써 내려갔다.
처음엔 팔목이 욱신거렸고, 글씨는 줄줄이 삐뚤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나도 못 알아보는 외계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묘하게 끌리는 희망과
플러팅 하듯 글을 써 내려갔다.
여전히 의욕적인 둘째 날.
글씨를 휘갈겨 써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팔목은 찌뿌둥하고, 속에서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조금? 아니, 가득히.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열정의 셋째 날.
습관도 없고, 근육도 없고, 심지어 인내심도 없는 내가
이걸 100일이나 해야 한다니?
작심삼일이 슬며시 귓가를 간질였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아침 70번.
밤에 자기 전 70번.
이렇게 한 번에 다 쓰는 대신, 나누어 적기로 했다.
신기하게 짜증이 덜했다.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더해보았다.
아침엔,
하루를 시작하기 전
목표를 무의식에 살짝 밀어 넣는다.
밤엔,
하루를 마치며
다시 한번 다짐을 눌러 찍듯 각인시킨다.
그런 의미부여는
생각이 조금 더 분명해지고,
하루의 감정이 방향을 잡는다.
다행스럽게 효과는 꽤 괜찮았다.
글도, 책도 전보다 한결 가볍게 손이 갔다.
시간도 줄었고, 집중력도 늘었다.
이게 최면의 힘일까?
90일째.
팔목은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글씨는 좀 더 나아졌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을 훈련 중이다.
그리고 늦게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내가 애타게 기다렸던 ‘봄’은
밖에서 오는 계절이 아니었다.
꽃 피는 소식, 따뜻한 햇살,
그 모든 외부의 변화는
내 안에서 먼저 움트는 희망과 의지가 있어야
비로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봄은 내가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나는 지금, 내 안의 봄을 걷고 있다.
그 봄은 내가 만들어가는 마음의 기후이고,
조용히 피어난 작은 변화들은
나를 조금씩, 앞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