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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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괜찮아지기를 선택했다.
어른의 사춘기에 방황하는 마음과 몸이 점점 지쳐갈 때쯤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아침 산행을 같이 해보는 건 어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우루사의 광고처럼 곰이 몇 마리가 내 몸에 올라타있는 것 같았으니깐
아내의 말은 그저 나를 이해 못 하는 억지의 말처럼 들렸다.
열심히 산 것에 믿었던 자신감은 어느새 허탈함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하고,
감정의 온도는 우울을 만들어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을 터였다.
무엇을 하든 선택을 해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선택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라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시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미루고,
감정이 만들어낸 우울을 보내고 있을 때 물음이 찾아왔다.
왜? 나는 우울할까?
경제적 결핍도 아니었는데,
불행한 삶도 아니었는데,
먹을 것에 걱정하고 입을 것에 고민하고 잠 잘 것에 고뇌했던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라톤 선수가 뛸 의미를 잃은 것과 같았으니
감정은 온도차를 극명하게 느끼며,
삶과 죽음의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보면 죽음이 삶을 대신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기 전에 벗어날 선택을 해야 한다.
충분히 슬프고 우울할 때쯤 자신에게 찾아온 물음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어야 한다.
내가 못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온 모든 것에 의미를 찾아야 했다.
자책하는 순간이 모든 것에 의미를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른의 사춘기에서 벗어날 선택은,
우리 주위에 항상 같이 있다.
감정의 온도에 보지 못할 뿐이다.
내가 아내의 아침 산행을 선택한 건
3개월이 흐른 뒤였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내가 걱정하고 후회하는 것들로부터,
삶의 무게를 견디려 하는 것들로부터,
관계에 참으려 하는 것들로부터,
과거의 나와 멀어지는 것이기에,
선택은 미루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선택을 행함에 있어 순탄한 행은 없다.
기존의 마음이 행을 방해하고,
기존의 규칙이 행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행의 어려움과 포기를 일찍이도 알아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행하는 것은,
이제 괜찮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괜찮아지기를 마음이 받아들이기까지,
아침 산행을 시작했다
덕분에 내 하루 중 아침에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마음이 불안할 때도,
미래가 걱정될 때도,
관계가 힘이 들 때도,
삶의 무게가 벅찰 때 일 때,
어른의 사춘기는 언제나 찾아올 테다
그러나 자신이 괜찮아지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잘 선택하고 행하고 이기며 살아갈 것이다.
나 스스로 괜찮아지는 마음으로 선택한,
아침 산행을 매일 행 하고 있다.
그 덕에 날마다 최고의 여유를 얻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