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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ul 25. 2024

마음 부실 공사, 재건축하기

작은 발걸음이 이끌어내는  큰 도전 

새벽 4시를 가리키는 시계. 아직 적막한 새벽, 눈이 스르르 떠진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 맞다. 어제 뉴욕에 왔구나.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시계를 보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이미 잠은 달아나 버리고 애꿎은 천장만 바라본다. 시차 적응을 하느라 어제 하루 종일 졸린 눈을 붙잡고 밤 10시에 쓰러지듯 잠들었다. 꽤나 피곤했을 텐데도 이 시간에 눈이 떠진 걸 보니 신기하다.

평소라면 꿈나라에 있을 이 낯선 시간. 블라인드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없고, 적막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낯선 침실의 적막이 나를 감쌌다. 이곳이 새삼스럽게 낯설게 다가왔다.



기왕 깬 김에 주변이나 둘러보자 하며 나갈 채비를 한다. 사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베이글. 뉴욕에 오면 질릴 만큼 베이글을 먹겠노라 다짐했다. 영화에서 보던 출근 전에 베이글 하나에 아메리카노. 막 잠에서 깬 나는 내가 상상한 뉴요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출출한 배를 달래고자 거리를 나섰다. 아직은 어색한 구글맵을 켜고 가장 가까운 베이글 샵을 찾았다. 새벽 6시 오픈 시간에 맞춰 갔는데, 문을 열기 전부터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양복 차림의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낀 직장인, 집이 근처인 듯한 캡 모자에 커다란 하얀 티를 입은 아저씨, 그 뒤에 지인인 듯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슬그머니 대열에 합류하는데, 마침 가게 문이 열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뒤로도 조금씩 몰려오는 사람들에 더 긴장됐다. 앞에서 버벅거리다 뒷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으면 안 될 텐데. 삐질삐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쩌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야..? 맛은 또 왜 이리 많은 거야. 내 발음을 듣고 웃으면 어쩌지' 온갖 생각을 하며 제발 줄이 천천히 사라지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출근을 앞둔 뉴요커들에겐 여유란 없다. 사람들은 '늘 먹던 걸로 주세요'만 말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주문을 해치웠다. 내 맘도 모른 채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 줄, 카운터 직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쭈뼛쭈뼛 쪽파 크림치즈 베이글에 우유를 주문했다. 주문을 끝내고 왠지 멍한 채로 자리에 앉으니 우습게도 그제야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든다. 사람 맘이란 간사한지,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면서!


머릿속에서 수백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린 게 무색할 정도로 주문은 빨리 끝났다. 직원은 내 발음이나 문법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주문을 받고 내 뒤의 사람들 주문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주문을 성공했다는 뿌듯함과 다음에는 더 잘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내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작은 성공이 마치 내 안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해외 생활의 시작은 마치 미지의 바다를 향해 첫 항해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 그 두려움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인생은 어쩌면 이렇게 작은 도전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첫 발을 내딛는 용기이다.


베이글 하나를 주문하는 일상적인 행위가 이토록 나에게 큰 의미를 줄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런 작은 순간들의 모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큰 목표와 성취에 눈이 멀어,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성취를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도전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힘이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모여 아름다운 은하를 이루듯,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한다.


어릴 때 했던 포도송이 스티커가 떠올랐다. 양치 잘하기, 책 한 권 읽기 미션을 성공한 뒤 작은 손으로 스티커를 꾹꾹 눌러 붙이던, 작은 도전을 이루며 들었던 큰 성취감이란. 잊고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것들로 칭찬받을 수 없기에, 노력을 감추고, 확실한 성과만을 내려 급급했던 나였다. 누구보다 빨리 성과를 쌓아 올리려 했지만, 마음은 뼈대 없는 건물처럼 되어 있던 것을, 이제는 차근차근 쌓아 올리려 한다. 


지금 나는 다섯 살 때로 돌아가 포도송이 스티커를 다시 채우고 있다. 직접 주문해 보기, 길 잘 찾아가기, 아침 인사 나눠보기 같은 작은 퀘스트들을 받고 이루어 나간다. 일상의 작은 도전들은 삶의 큰 활력이 된다. 오늘 점심엔 처음 접한 음식을 먹어보거나, 출근길에 색다른 음악을 들어보고, 잘 가지 않던 동네에 가서 걸어보는 등의 작은 변화가 내 취향을 넓혀주고 새로운 자극을 준다. 어릴 땐 하루가 길게 느껴졌던 건 매일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더라도, 그 사이 작은 새로움을 넣어보는 건 어떨까. 작은 새로움을 발견할 때마다 나에게 포도송이 스티커를 주며 작은 칭찬도 곁들이며 말이다. 그렇게 부실했던 내 마음에 재건축을 들어가고 있다. 이제껏 건네었던 닦달이 아닌, 내게 휴식과 새로움을 건넨다.


해외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주문을 성공했으니. 이제껏 내디딘 걸음 중 가장 보잘것없으면서도 가장 큰 한 걸음이다. 스스로에게 칭찬 한마디 건네본다. 이제껏 제일 멋없던 주문에 대한 칭찬이지만 내 마음으로 향하는 가장 큰 한 걸음의 칭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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