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어 콤플렉스 극복기
나는 영어 콤플렉스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영어 학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 매주 열리는 떡볶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꾸준히 다녔지만,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이 되면서 영어 공부는 확연히 달라졌다. 시험을 치기 위해 교과서의 영어 본문을 통째로 외우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암기만 해야 하는 영어 공부법은 나와 영어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한국식 영어 교육에 넌더리가 났다.
결정적으로 나에게 큰 충격을 준 건 고등학교 영어 발표 시간이었다. 소개하고픈 주제를 영어로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첫 번째로 발표를 해야 했다. 대본을 달달 외운 채 PPT를 띄우고 애들 앞에 섰지만,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어 목소리만 덜덜 떨며 대본 첫 줄만 열 번은 더 반복했다. 결국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진 채로 자리로 돌아갔다. 발표 점수보다는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떨어졌다.
대학교 입학 때는 영어 성적이 필수였다. 입시를 준비하며 한국식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 악물고 열심히 했지만 영어에서만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가채점을 한 뒤 엄마와 전화하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 빠져라 엉엉 울며 이제껏 푼 영어 문제지와 학습지를 정리해 보니, 그 양이 무릎을 넘어섰다. 그때 오기가 생겼다. 이대로 영포자로 지내고 싶지 않아 원어민 교수님들로 이루어진 영어 수업으로만 진행되는 과로 진학했다. 1학년 때는 교수님의 말을 눈치껏 알아들으려 애썼고, 2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극복하기 위해 뉴욕으로 인턴십을 나갔다.
8년간 요리를 하고 있는 나는 두세 차례의 인터뷰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입사하게 됐다. 뉴욕에서의 첫 출근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것도 처음인데, 그것이 미국이라니! 지도를 보며 57번가 정거장에서 내려 링컨 센터 바로 앞에 있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매니저로 보이는 분에게 일을 하러 왔다며 헤드셰프 이름을 대니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긴장을 풀 겸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앞으론 와인과 갖가지 양주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선반이 있고, 기다란 바 테이블 뒤로 작은 테이블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치형의 높은 천장에 달린 주황색 조명이 가게 분위기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곳에서 검은색 와이셔츠에 빨간 앞치마를 맨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박자에 맞춰 접시를 들고, 옆으로 턴하며 다시 접시를 내려놓는 그들의 동작이 일사불란하게 어우러졌다.
발로 탁탁 소리를 내며 속으로 박자를 세어보던 중, 지하 계단에서 얼굴이 살짝 보이더니 누군가 올라왔다. 그 사람은 구즈만, 헤드셰프였다. 나의 보스가 될 그를 보니 생각보다 젊은 나이에 놀랐지만, 환한 웃음 속에 공존하는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그의 손에 깃든 악수에서 느껴졌다. 젊은 나이에 보스 자리까지 오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지하에 파티와 VIP를 위한 프라이빗 룸을 둘러보았다. 걸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숨겨진 방들이 꼭 꼬불꼬불 미로 찾기를 하는 듯하다. 다음으로 주방을 살펴보며 앞으로 함께할 동료들을 소개해 주었다. 서버들까지 3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인원에 'Hello, I'm 00'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되었다. 소개를 끝내고 보니 레스토랑에서 유일한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긴장감과 설렘에 가슴이 요동친다.
조리복을 입고 나온 피터와 만나게 되었다. 뉴욕 출신인 피터는 덥수룩한 수염과 갈색 눈동자로 매력을 뽐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에게 칼을 빌려주며 간단한 업무를 설명해 주었다. 2년 동안 영어로 수업을 받아왔지만, 현지인의 빠른 말속도에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질문을 하고 싶어도 긴장으로 인해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번역기를 사용해 물어보았다. 그때 피터는 나의 상황에 맞춰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피터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게 돕기 위해 최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고, 그의 친절한 태도 덕분에 불안이 조금은 가시게 되었다. 피터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도움이 너무나 고마웠다.
첫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온몸이 뻐근하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이름은 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앞으로 적응하려면 영어 공부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정리하며 스스로 다짐했다. 발표에서 한 마디도 못 했던 내가 지금은 뉴욕에서 영어로 일을 배우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변화와 성장을 느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욕 생활을 마친 지금의 나는 영어로 일상 대화는 수월하게 하고, 어려운 단어와 전문적인 말을 남발하지 못해도 하고픈 말을 나눌 수 있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영어를 즐기며 사용하는 중이다. 이게 다 좋은 동료들과 인연들을 만나 이곳저곳 놀러 다니고, 일하며 배운 덕이다. 예전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영어와의 관계는 평생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자국어인 국어도 배움에 끝이 없는데, 다른 나라의 언어는 더더욱 그렇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영어학원을 다니며 계속 배우고 있다. 평생 배우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매일 더 나아갈 수 있는 영역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잘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눈물 흘리던 어린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잘하고자 했던 작은 마음이 날 이끌어 이렇게 뉴욕까지 데려왔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