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진 집 찾아 둥지 찾아 떠나는 여정
집은 가족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는 곳일 수도, 하루의 고단함을 녹이는 피난처일 수도 있다. 홀로 사색에 잠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는 곳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각자에게 집은 다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나에게 집이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남들보다 일찍 독립했다. 만 15살부터 집을 나와 지내기 시작했으니 '집' 하면 가족들과 함께 지낸 하나의 집이 아닌, 거쳐 갔던 여러 군데의 보금자리들이 떠오른다. 여긴 우리 가족들이 사는 집, 이곳은 내가 처음 독립하여 지낸 나의 첫 집, 여긴 이 친구랑 살았던 집, 여긴 제일 오래 살았던 집. 이렇게 성인이 되기 전부터 '집' 하면 부모님이 계신 집보다는 다른 곳들이 먼저 생각났다.
이처럼 많은 집들을 거쳐가며 방을 구하는 것이 번거롭긴 해도 어렵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국에서는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나 빌라 중에서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어느 나무를 택할까 고민은 했어도, 어느 나무든 들어가면 되니 집 구하기는 나에게 식은 죽 먹기, 누워서 떡 먹기였다.
미국에서도 방 구하기가 어렵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한국에서 본 미국 방 사이트에도 방이 많았고, 그중 아무 방이나 하나 잡아도 괜찮을 듯싶었다. 어디든 내가 살 곳은 있겠지, 인심 쓴다는 격으로 넉넉하게 3일이나 집을 구하기 전 숙소를 미리 예약했다. 집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빨리 구하면 숙소 환불이 되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집 구하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한국에서 본 방 사이트에는 방이 많아 보였지만,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현실은 달랐다. 한국과 달리 부동산 시스템이 다르고, 집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마음은 조급했지만, 조건에 맞는 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미리 알아보지 않은 안일했던 점에 뒤늦게 후회해 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래도 일 년 먼저 지낸 선배의 추천으로 지역을 확 추슬러 집값과 치안 모두 나쁘지 않은 퀸즈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집을 소개해주고 차로 이동하며 편리하게 집을 볼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집을 직접 찾아가야 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매물을 하나씩 비교해 가며 몇 군데 점찍어보고 하나씩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미국에는 인터넷에 오픈하우스라고 매물을 올려놓는다. 입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과 날짜 안에 직접 찾아가 방을 살펴보고 원하면 집주인에게 의사를 표한다. 이때 빨리 한다고 임자가 아니라 집주인이 원하는 조건과도 맞아야 한다.
우리도 오픈하우스들을 살펴보다 마음에 쏙 드는 방을 발견했다. 곧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기에 마음 같아선 오늘 당장에라도 이 집을 계약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곳을 계약하려면 미국 내에서 일정 수입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 액수는 우리가 일을 하고 있던 입장이라도 기준을 맞추기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렇게 방이 괜찮다 싶으면 요구 조건에 우리는 부합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과 불안감이 커졌다. 매일 밤 숙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은 꼭 집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집은 구하지 못한 채로 시간은 흘러 숙소는 당장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싸고 싼 방을 골랐는데도 침대 하나만 있는 방과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숙소에 하루 묵는데 십만 원이 넘는 돈을 내야 했다. 집 계약금을 제외하곤 수중에 돈이 넉넉지 않던 터라 부모님께 연락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았다. 이만큼이나 집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 있었던가! 학생 때 살던 침대만으로 꽉 차던 원룸방도 저절로 그리워진다.
이때 다행히 선배 자몽의 도움으로 선배네에서 며칠간 신세 지게 되었다. 처음 선배네를 놀러 갔을 때 방 구조가 매우 독특하였다. 레일로드 형식의 집으로 방과 방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러니까 제일 안쪽에서 방을 쓰는 사람이 거실을 사용하려면 다른 방을 하나 거치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선배들의 배려로 제일 안쪽 방에서 묵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어디 집을 가볼까 찾아보고, 밤이 되면 퇴근한 선배들을 맞이해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민폐 끼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음은 더 초조해만 갔다.
이때 이곳 근처에 한인 부동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후, 나와 친구는 다음날부터 동네를 몇 바퀴씩 돌며 그 부동산을 찾아 나섰다. 이때 영어로 뒤덮인 간판들 속 한국어로 '해피'라는 글자가 위화감을 뛰며 자리해 있었다. '여기는구나! 드디어 찾았다!' 하며 달려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간판에 적혀있는 번호로 연락해도 응답이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 한두 번씩 사장님이 계신가 확인하러 갔다.
이렇게 또 찾아간 어느 날, 늘 닫혀있던 셔터문이 반쯤 올라가 있었다. 후다닥 문에 딱 붙어 안을 살펴보니 사장님이 계셨다! 그렇게 문을 두드려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코로나 이후로 방문한 손님이 처음이라며 사장님도 놀라며 반가워하셨다. 오랜만에 온 손님인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방을 구해주겠다고 하시며 우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뒤 드디어 방을 얻게 되었다. 사장님이 이곳저곳 연락해서 우리 조건에 맞는 집들을 수소문해 준 덕이었다.
인심 좋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존이라는 집주인이 있는 이 건물에서 우리 집은 일층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이곳도 레일로드 형식의 집으로 거실 하나와 방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이 나무 상판이라 맨발로 걸으니 까슬까슬한 느낌이 따끔하게 들었다. 이래서 미국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방에 드나드나 하고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예전 방을 쓰던 분이 가구들을 다 두고 가 침대며 책상이며 다 갖춰져 있었다. 미국은 셰어하우스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가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구와 생활용품 지출도 꽤나 많은 금액이 드는데, 가구 살 걱정은 덜었으니 참 다행이었다. 이렇게나 안성맞춤인 집이 생기다니. 역시 사람 일은 예상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지만,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행운들이 더 감사하게 느껴진다.
또 덕분에 선배들과 잠시나마 동거동락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아나갔다. 돌이켜보니 그 하루하루가 참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풀숲에서 행운이 떨어져라 네 잎클로버만 눈 빠지게 찾다 행복을 주는 세 잎클로버가 얼마나 예쁜지 잊고 있었다.
앞서 질문한 나에게 집이란. 두 발 뻗고 맘 편히 잘 수 있는 곳이자, 동료처럼 든든하고 안식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조금 오래되었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어도, 그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는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드디어 내 동료가 정해졌다. 이번에 내 집은 여기구나. 짐 정리를 하며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밖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도 쉴 곳이 있으니 이제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를 감싸줄 유일한 안식처. 타국에서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이곳. 짐 정리를 끝내고 한층 홀가분해진 마음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집의 진정한 소중함과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며 우당탕탕 집 구하기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