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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Jun 23. 2022

빨리빨리 문화

누리호를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에 아내의 문자를 받았다.

계란과 우유를 사 오란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명령을 받았으니 임무를 수행한다.

슈퍼마켓으로 간다. 슈퍼마켓이라 불러도 크기는 마포구 공덕동의 이마트 만하다.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 가, 한참을 걸어 제일 뒷 쪽의 냉장 코너로 간다.

포장된 계란을 집어 들고 평소 교육받은 대로 유효기간을 확인한다.

냉장고 저 깊숙이 유효기간이 좀 더 긴 계란은 없는지도 꼼꼼히 본다.

깨진 계란은 없는지 포장을 열고 계란 하나하나를 살핀다. 



우유 코너로 가, 평소 마시는 우유를 정확히 고른다. 세일한다는 우유 아무거나 

사갔다가 욕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잊을 뻔했던 유효기간 확인을 마친다.

하마터면 또 욕먹을 뻔했다.

한 손에 계란 다른 한 손에 우유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임무를 무사히 끝마친 거 같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퇴근시간 무렵이라 그런지 계산대의 줄은 길고 길었다.

내 줄의 직원만 만사가 태평해 보였다.

눈과 손은 슬로 모션이었고,

입은 모든 고객이 가족인 듯 안부를 묻고 있다.

내가 선 줄 빼고 다른 줄들만 짧아지고 있다.


계란 24개와 1 갤론(약 3.7리터) 우유를 아령처럼 들고 서 있다.

손을 바꿔보지만 힘이 들긴 마찬가지다.

짜증이 나며 호흡이 거칠어진다.

심부름시킨 아내를 원망한다. 얼마 전에 시장 안 갔었어?!

계산대의 직원을 노려 봐 보지만 내 눈만 아프다.

케겔운동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평화롭게 줄 서 있다가 울화통이 터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가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직원은 긴 줄을 마주하면서도 서두르는 모습이 없다.

아내와 줄을 서게 되면 아내는 임무가 하나 생긴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남편을 진정시켜야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내는 나를 이해 못 한다. 가만히 줄 서 있다가 미쳐가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빠르다는 뉴욕에서 조차 이렇다. 지방으로 가면 

거의 매번 인내심을 테스트받는다.


영화 주토피아의 나무늘보를 실사판으로 보는 꼴이다.


긴 줄에 서 있다가 미쳐가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원래 이런 거야.. 조금 빨리 가서 뭐해! 천천히 살면 어때!

절대 아니다! 

한국인의 힘은 빨리빨리다!


뭐든 빨리빨리 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버틸 수 있는 거다.

빨리빨리 해보고 아니면 말고..

다시 빨리빨리..

시행착오?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배운 건 있다.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겠구먼..

머리 나쁘면 절대 빨리빨리 할 수 없다.



뉴욕에서 바라본 한국은 확실히 선진국이다.

국민총생산 같은 건 모르겠고 문화 선진국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따라갈 나라가 없고, 본받아야 할 나라는 드물고, 우리는 세계 문화를 이끌어 나가야 할 나라다.

나는 그것이 빨리빨리 문화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과 일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빨리빨리!

허리 업, 콰이콰이. 하야쿠, 라삐도....


케이 팝, 케이 드라마, 케이 푸드(Food)

한국은 클래식 음악, 발레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빨리빨리 안 하고는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실패를 했어도 빨리 잊고 다시 도전!

빨리빨리 문화를 하류 문화 취급하며 한국인은 이래서 안 된다고

외치던 식자층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그중에는 고 3 때 담임도 있었다.

내가 자라면서 늘 듣던 한국인은 냄비근성 때문에 안된다는 말이 이제는 칭찬처럼 들린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래야 다음 음식도 만들 테고.


하늘로 뻗어 나가는 누리호를 보고 있자니 펄펄 끓는 한국인의 근성이 떠 올랐습니다.

누리호의 성공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교포의 국뽕이 아닙니다.

소식을 전하는 외신들의 부러움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옳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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