뻣뻣한 놈

고개 숙이기

by Henry Hong

나는 뻣뻣한 놈이었다.

낯을 가려 친해지기까지는 시간도 걸린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만 말이 많아진다.

친해지면 누구를 만나 건 장난칠 궁리를 한다.

솔직히 지금도 아는 노인을 보면 골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

뻣뻣함은 관계를 명확히 해, 만만한 모습을 안 보이려는 찌질한 본능이었다.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학생이라는 신분까지만

한국에서 살았다. 25년의 시간이었다.

고개 숙이기? 그런 생각 없이 살았다.

어딜 가서나 인사도 대충대충 하는 딱 그 수준.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들 하고만 살았으니 고개 숙일 일이 있겠는가!

주변 환경도 그랬다. 1990년대의 한국은 학생이 벼슬이었다.

학생이라면 많은 걸 용서받았다.

술 마시고 싸움을 해도 교통법규 위반을 해도 훈방조치가 대부분이었다.

쉽게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아니 세상을 모르고 살 때였다.


미국에 오고도 한 동안은 뻣뻣함을 유지했다.

미국은 더욱더 고개 숙일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단하게 자존심을 세우거나 하는 건 아니고.

관공서 같은 곳에 볼 일을 가서는 알아듣지도 못 한 영어를

다시 묻거나 하지를 않았다. 일 처리를 잘 못해 재방문을 해야 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었다. 참 한심한 놈이다.

학교에서는 과묵하게 앉아 있었고 (영어를 못 해서 그렇다)

한 교실 사람들과 인사도 없이 지내 건 했다.

잘 못 들은 숙제를 남들에게 묻지도 않았다.

괜히 고개 숙이는 것 같아 물어보기가 싫었다.

바뀐 환경과 문화에 뻣뻣한 심성이 더해져 사회부적응자가 됐다.


방에 틀어 박혀 싸구려 맥주나(미국에는 물보다 싼 맥주가 많다.)

쌓아 놓고 마시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일본인과 룸메이트를 하게 됐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예전 글 '국적 다른 친구들과의 인연"에 자세히 썼다.

https://brunch.co.kr/@newyorkbuja/114


일본인 친구는 오토바이 라이딩을 즐기는 속도광이었다.

장거리 여행에 비바람을 뚫어 가며 라이딩을 하는 다소 무모한 친구다.

게다가 틀림없이 알코올중독자였다.

지금은 그냥 아들 둘에 무서운 와이프와 사는 아저씨.

그 친구에게 일생일대의 교훈을 배웠다.

고개 숙이기

그렇다고 이 친구가 유달리 예절을 차리는 건 아니다.

그냥 상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거나 도움을 받으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도움을 줄 때도 고개를 숙인다.

내 앞, 고개 숙인 사람에 대한 배려다.

의견 대립이 있으면

"오..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를 인정하고 안 하고는 그다음 문제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크게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다.

그저 고개 숙여 공감할 뿐이다.

어차피 나이 상관 안 하는 미국이니 나이 어린 친구에게도 할 수 있다.

내가 예의를 차리니 그들도 예의를 보인다.

고개를 숙이니 스몰토크도 쉽게 이어진다.

어른에게는 칭찬도 받는다.

그럼 난 또 놀려 먹을 궁리를 할 수 있다.


뻣뻣한 고개보다 백번 나은 처세술의 시작이었다.

타 인종과의 첫 만남에서,

목례를 하니 상대방이 당황한다.

그의 얼굴이 마치

이 인간처럼 인사를 해야 하나?를 묻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니 상대도 예의에 신경 쓴다.


요즘에는 미국 TV에서도 자주 보는 현상인데

목례를 하는 경우가 있고,

감사를 표할 때도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는 거다.

예전에는 못 보던 현상이다.

옛날 시상식과 요즘 시상식 장면을 비교하면 금방 알 일이다.


아들에게 내가 배운 교훈을 가르친다.

유연한 목을 가져라.

목례 정도의 의사 표현을 해라.

바디랭귀지에 고개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네가 상대를 인정하면 상대도 너를 인정할 거다.

경험 상, 고개를 숙이니

붕어빵 사장님이 붕어빵 두 마리를 덤으로 주시고,

술집에서는 서비스 안주를 받고,

호텔에서는 체크 아웃 시간을 늘려 받았다.

참고로 고개를 숙이라고 했지. 허리를 숙이라고는 안 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다.

야스오오토바이.jpeg

일본인 친구가 일본으로 돌아가며 주고 간 오토바이

친구가 오토바이를 주며 한 말은 "죽지 마!"였다.

여러모로 교훈을 준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