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여행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작업장으로 나갔다.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일을 빨리 시작하고 퇴근 시간을 앞 당기자고 사장과 합의를 봤다.
스패니쉬 직원들이 불만스러워할까 봐 눈치를 봤는데, 그들도 뉴 스케줄에 환영했다.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후앙과 세군도에게 페인트 작업 지시를 한다. 천장 이음새에 테이핑을 세심히 하라고 이른다. 지난번, 테이핑을 허투루 해서 새어 나가 번진 페인트 때문에 공사 끝나고 한 달여 만에 페인트칠을 다시 한 경우가 있었다. 페인트 작업을 다시 하려니 사포로 기존의 페인트를 벗겨 내는 작업까지 해야 했다.
페인트 먼지가 사방으로 날려 집주인 얼굴 보기가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집주인이 화를 낼만도 했지 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후앙과 세군도에게 화가 치미기는 마찬가지다.
인상 쓴 얼굴로 그 둘을 쳐다보고는 임시로 만든 쪽문을 지나 작업 현장 밖으로 나온다.
근처에 주차해 놓은 차로 향한다. 아침인데도 차는 벌써 뜨거운 공기를 내뿜고 있다.
차문을 열고 잠시 서 있다가 차에 오른다. 시동을 걸어 창문부터 모두 연다.
백미러로 뒤쪽을 보고 고개 돌려 좌우를 살핀다. 가슴팍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 든다.
운전면허증 뒤에서 그녀의 사진을 조심스레 꺼낸다. 혹시 사진이 다칠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오래된 사진이라 두 모서리는 이미 닳아 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오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
그녀와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이 홍콩의 어느 골목이 되기도 하고 명동, 신촌이 되기도 한다. 열아홉 살의 나,
나는 한국말을 하고 그녀도 한국말을 한다. 내가 영어를 하면 그녀도 영어를 한다. 그녀는 중국 말을 안 한다.
우리는 80년대 미국 팝송을 듣기 좋아한다.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워크맨을 갖고 다니다 마음 내킬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둘이 길을 걷거나 대화를 나눌 때도 어디선가 음악은 들려온다.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이 귓가에서 끊이질 않는다. 그녀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음악 얘기를 나눈다. 마돈나의 남성 편력을 화제에 올린다. 등려군이 죽기 전 1988년이지만 등려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명동의 어느 골목길을 걷다가 아이스크림 노점상을 발견한다. 그녀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 보고는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내가 받아 든 아이스크림은 그녀의 입을 향한다. 부드럽게 한 입을 베어 무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본다. 그녀가 베어 문 자국이 있는 쪽으로 나도 한 차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문다.
나는 크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계속 들려오던 음악이 멈춰있다. 여기는 어디인가?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한 공간이다.
육체의 피곤도 의식치 못한다. 그저 나와 그녀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와의 대화가 많아질수록 현실의 나는 과묵해진다.
시간만 나면 들여다보던 핸드폰 대신, 습관처럼 그녀의 사진을 꺼내 본다. 오늘은 홍콩의 뒷골목을 둘러볼 거다. 쇼핑몰들이 즐비한 침사추이 쪽보다는 샴슈이포가 정겹다. 80년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늘어진 흰색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를 흔히 볼 수 있는 곳. 좁고 어디서 끝날지 모를 골목을 느리게 걷는다. 가게가 즐비하지만 파는 물건은 거기서 거기다. 헬로키티 상품이 있고 일본 만화책, 머리핀, 작은 손지갑 같은 것들만 진열되어 있다. 어차피 파는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의 손을 아직 못 잡아 봤다. 장소 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잡아 보려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난밤 그녀의 침실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손을 잡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수줍은 가슴, 알맞게 솟아있는 아랫배, 배꼽에서부터 솜털이 선을 만들며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연결된다. 나는 입술로 그 선의
처음에서 끝을 향한다.
나의 격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그녀의 목소리. 가느다란 팔목이 내 귀를 간질인다.
나는 아직 그녀의 손을 잡아 보지 못했다. 손을 만지며 부드러운 키스를 건네고 싶은데 상상이 안 된다.
격한 정사를 몇 번이고 치렀지만.. 옷에 가려진 그녀 몸을 구석구석 알고 있지만..
나이 든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와 줬지만, 그녀는 내가 찾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를 찾고 싶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