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단양
그녀의 지갑을 주운 지 사 일째이다. 혼자 있을 때면 나타나는 그녀의 환상, 그녀에 익숙해지는 나.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을까 봐 상실감을 느낀다. 루이뷔통은 내 차의 의자 밑에 감추어져 있다. 패튼 가죽에 지퍼로 둘러진 장지갑. 반듯하고 정교한 문양이 현실적이지 않다. 빛을 반사시키는 진한 자주색이 보석 상자를 연상시킨다. 나는 사진 속 그녀를 찾아 어쩔 셈인가? 그냥 YMCA의 사무실에 지갑을 맡겨야 할까?
나는 현실과 상상을 구별 못 하게 된다.
현실보다 생생한 상상이 당황스럽다.
마누라와 아이는 자겠다고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잘 자라고 인사한다. 쿠션으로 머리 받침을 만들고 소파에
편히 눕는다. 전화기에 헤드폰을 낀다. 유튜브에 접속해 키워드로 추억의 영화 음악을 입력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이 흐른다. 오드리 헵번이 비상계단 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사진 속 그녀와 연세대 앞 독수리 다방 앞을 지난다.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다방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는다. 얼마 안 걸어, 지하의 에스프리 카페로 들어간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묵직한 안개 같다.
얕은 칸막이 뒤로 보이는 손님은 모두가 연인이다. 자리를 잡아 그녀와 앉는다. 파르페 두 개를 주문한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주문한 파르페가 테이블에 놓인다. 먹기 아깝도록 이쁜 체리를 보고 그녀의 눈을 본다. 깊은 눈이다. 빨간 입술이 체리보다 탐스럽다. 더욱 간절 해진다.
뭘까? 갑자기 끼고 있던 헤드폰이 귀에서 확 낚아 채인다.
놀라서 눈을 뜬다. 마누라가 나를 내려 다 보고 있다.
짧은 외침, 들어가 자!라는 말이 들린다. 헤드폰에 연결된 전화기가 소파에서 떨어진다.
지난 칠 일간 사진 속 그녀만을 생각했다. 차를 주차하고 동전을 시간 한도까지 채워 넣었다. 서두르지 않는다. 딸아이에게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탈의실 앞에서 헤어진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메인 홀을 둘러본다. 중국말, 스패니쉬, 한국말이 동시에 들린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벌리는 경연장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 생소하다. 사람들 목소리에 집중한다. 소음 속에서 단양이라는 단어를 찾는다. 삼십 년 후의 그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중국 여인네들을 뒤로하고 수영장으로 간다. 불쾌한 소독약 냄새가 먼저 반긴다. 딸아이를 찾아본다. 한눈에 찾을 수 없다. 객석 쪽으로 눈을 돌려 띄엄띄엄 앉아있는 아이들 엄마를 살핀다. 모두가 고개 숙여 전화기를 보고 있다. 이곳에도 내가 찾고 있는 얼굴은 없다. 중국말 소음이 튀어나온다. 누군가 이어폰 없이 비디오를 본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학년 아이들이 있는 수영장으로 간다. 여섯, 일곱 살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헤엄을 친다. 유리창 건너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엄마들. 동물원 수족관의 느낌이랄까..., 조금은 우스운 모습이다. 유리창 밖 수족관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 걸까? 몇 안 되는 동양 엄마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자리를 뜬다. 주변에 나 이외의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작은 수영장이라 서로의 자식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순 없었다. 좁은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북적거리는 메인 홀로 되돌아와 시계를 본다. 차로 가서 동전을 미터기에 넣는다. 딸아이의 수영이 끝나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딸아이의 수영장으로 되돌아간다. 객석에 앉아 아이를 찾는다. 이 아이 저 아이 사이에서 딸아이가 보인다. 무의미해 보이는 동작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수영을 한다. 몇 주 만에 수영하는 모습을 본 건데 별로 나아진 건 없어 보인다. 보통은 아이 내려주고 던킨으로 가서 신문을 읽던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지금 뭐 하는 건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본다. 딸아이를 보면서 고개 돌려 주변의 여자들을 본다. 어정쩡한 자리에 앉아있어 앞쪽의 여자들은 뒤통수밖에 안 보이고 뒤쪽으로 고개 돌려 보기에는 핑곗거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이게 잘하는 짓인가? 딸아이가 나를 봤는지 손을 흔든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든다.
소독약 냄새를 뒤로하고 수영장 문을 나오고 있었다. 크지 않은 유리 창문 뒤로 그녀가 보였다. 삼십여 년이 흘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숨에 그녀의 발걸음을 쫓는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많다. 말 걸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그 와중에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반쯤 풀어져 버린 파마머리, 약간 돌출한 눈, 자그마한 코, 보였다 말았다 하는 귓불 큰 귀, 주름 없는 입술. 그녀의 얼굴에서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을 찾는다. 현실과 상상을 하나씩 대조해 본다. 그녀가 틀림없다. 곱게 나이 든 얼굴. 여전히 아름답다. 막상 그녀를 찾게 되니 현실이 꿈같이 느껴졌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댄다. 그녀의 얼굴에 좀 더 집중해 본다.
누군가의 얼굴을 집중해서 쳐다본 사람은 안다.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하게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3초 이상 남의 얼굴 보고 있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바빠 보인다. 건물 안의 중국인을 모두 아는 듯이 인사할 사람이 많다. 편히 복도와 계단을 지나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에 섞여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도 가 보고 계단 한 층을 사이에 두고 지켜보기도 한다. 사진 속 그녀를 진짜 찾게 될 줄이야,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아이의 수영이 끝날 시간, 주차 미터기에 동전을 넣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용기를 내야 할 시간이다. 지갑을 돌려줘야 한다. 그녀가 혼자되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메인 홀을 지나 밖으로 향한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쫒는다. 풀어진 파마머리와 좁은 어깨가 바로 눈앞이다.
익스큐즈 미! 헬로! 그녀가 뒤돌아본다. 루이뷔통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가슴 쪽으로 내민다.
그녀의 큰 눈이 더 커진다.
What is this? 웃지 않으며 그녀가 묻는다.
I was looking for you, isn't this yours? 내 목소리는 작아졌다.
이 여자가 아니었나? 나는 지갑을 열고 단양이라고 쓰인 멤버 카드를 꺼내 들고 당신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Oh, Dan Yang I know her!"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이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이 여자가 나보고 따라 오란다. 단양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단다. 나는 말없이 이 여자를 따른다. 계단을 오르고 메인 홀을 지나 어느 룸으로 들어간다.
네 명의 여자 노인들이 마장을 하고 있다. 나를 안내해 온 여자가 어느 노인에게 다가가 중국말을 한다. 노인이 귀찮은 투로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와 같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여든은 돼 보이는 노인이었다. 작은 키였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에게로 걷는다. 노인의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아본다.
이 사람이 단양 일 수는 없다. 나이가 안 맞는다. 그녀의 늙은 얼굴을 상상할 수 없다. 다가온 여자가 나에게 이 분이 단양이라며 소개한다. 이 상황을 이해 못 한 나는 지갑을 꺼낸다.
노인에게 이 지갑이 당신 것이냐고 묻는다. 노인이 자기 것이 맞다며 손을 내민다.
나는 지갑을 내 쪽으로 거두며 지갑 안에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묻는다.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고 노인이 대답한다.
나는 대뜸 지갑을 열고 사진을 꺼내 이 사진 속 여자는 누구냐고 묻는다.
내 죽은 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