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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선의 Oct 21. 2024

전업맘 변신 후 깨달은 다섯 가지

초1 육아휴직으로 알게 된 전업맘의 세계

무급 육아휴직을 한 지도 어느덧 10개월. 직장으로 돌아갈 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워킹맘으로만 살다가 갑자기 1년 간 전업맘이 되니 모르던 세상이 보였다. 전업맘으로 변신하고 깨달은 다섯 가지를 정리해본다.




  하나. 주부는 단돈 몇 백원에도 망설인다. 남편 정장바지나 아이 점퍼, 운동화 드라이클리닝을 위해 이용하는 세탁소 ‘크린토피아’엔 세일하는 날이 있다. 매주 수요일은 ‘클리닝데이’라는 이름으로 회원들에게 7% 할인을 해준다. 세탁해야 할 바지를 이틀 묵혔다 수요일에 맡기면 380원을 아낄 수 있다. 지지리궁상 같아 보이지만 땡전 한 푼 못 버는 무급 휴직자인데다 가정경제를 운용해야 하는 주부가 되니 그렇게 변했다. 월급을 받을 땐 내 커피며 후배들 커피며 펑펑 잘도 샀는데. 궁상맞아 보이더라도 그렇게 아낀 380원으로 아이에게 마이쮸 하나 더 사줄 수 있었다. 참 잘했다.


크린토피아엔 일주일에 한번, 7% 할인을 해주는 '클리닝데이'가 있다. 남편 정장바지를 이삼일 묵혔다 가져가면 380원을 아낄 수 있었다. (사진: 크린토피아 홈페이지 캡처)


  둘. 3월에 열리는 초등학교 오리엔테이션에는 꾸미고 가는 게 아니었다. 2년 전 찾았던 아이 영어유치원 설명회에는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모인 엄마들이 가득했는데(결국 영어유치원에는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오리엔테이션도 그런 분위기인 줄만 알았다. 나는 속눈썹까지 아찔하게 올린 풀메이크업을 하고, 옷장을 뒤져서 명품이면서도 티가 최대한 덜 나는 무거운 가죽가방을 들고, 윤기가 도는 코트를 챙겨 입고 학교 강당을 찾았다. 가는 길부터 아차, 싶었다. 회사에서 급하게 온 워킹맘이 아니고서야 전업맘들은 다들 안 꾸민 듯하게 꾸민 ‘꾸안꾸’ 화장으로 선크림에 립밤 정도만 바르고 편안한 셋업에 운동화를 신고 온 것이었다. ‘완전히 망했다.’ 수수하지만 원래부터 색이 예쁜 홍학들 사이에 잔뜩 꾸민 공작새가 침범한 것 같았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물론 교육열이 더 높은 사립 초등학교는 다를 수 있다. 이곳은 학군지라 불리는 곳의 공립 초등학교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학군지의 전업 엄마들은 모두 수수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냥 친근하지만은 않은 포스가 있었다. 잘 사는 집 특유의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몸에 배어있는 듯 했고 그들에겐 꾸미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초등학교 오리엔테이션엔 이렇게 입고 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학군지 공립초등학교 전업맘들은 모두 꾸안꾸이지만 수수하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망했다. (사진 : 픽사베이)


  셋. 우울할 땐 비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번잡한 날은 꼭 있다. 차오른 스트레스에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날. 대개는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15분 남짓 동안 교문 근처에서 만난 아이 친구 엄마들과 하하호호 인사를 나누고 스몰토크를 하는데, 그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비 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큰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야를 가리고 갈 수 있으니. 우산 때문에 못 봤다는 핑계로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공식적 핑계가 생기니까. 나란히 걷더라도 내 우산과 상대방의 우산 지름만큼의 거리를 둘 수 있으니. 비가 세차게 오는 날엔 그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테니. 

확실히 아이가 하나인 ‘외동맘’ 나와 달리 모든 것을 두 번째로 해보는 ‘둘째맘’들은 스몰토크에 능했다. 한 번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그들은 어제와 오늘의 날씨, 학교 학사일정, 오늘 저녁 반찬 이야기로 15분의 시간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리드미컬하게 넘겼다. 스몰토크도 능력이었다. 나도 만약 둘째가 생긴다면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아마도 비가 자주 오기만을 기다릴 것 같다.


  넷. 외향형 인간도 내향형으로 바뀐다.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거의 100%에 가깝게 ‘E’가 나오는 모태 외향형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의 매니저 같은 단조로운 생활을 열 달쯤 하고 나니 반 정도는 내향형으로 바뀌고 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이사를 왔기 때문일까. 동네 친구도 적은데다 생활이 단조롭고 만나는 사람이 적어서인 듯하다. 학기 초엔 몇몇 아이 친구 엄마들과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친구라거나 사회에서 일하며 만난 사이가 아니기에 친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 집 사정을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쪽 집안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어야 하는지도 아리송했다. 잘 모르겠으니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그냥 입을 닫게 됐다. 

  내 자식 자랑을 할 게 아니라면 아이 친구 엄마와 대화를 해봤자 ‘내 아이의 잘난 친구’에 대한 데이터만 쌓아서 스스로 비교 대상을 늘려가는 꼴이 되었다. 상처 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몇몇 잘난 친구들의 데이터에 나는 나를 지키는 방어막을 쳐야겠다 느꼈고, 결국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게 되었다.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아이들은 다니던 학원 스케줄을 재정비했고 그에 따라서 친해졌던 엄마와도 만날 접점이 적어졌다. 2학기를 맞은 아이들은 혼자 등하교 하는 연습을 시작했고, 교문 앞에서 엄마들을 만나는 횟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은 것은 개인적인 작업을 하거나 집안 살림을 하기엔 편했지만 그만큼 외로웠다. 나만 사회에서 멀어지고 도태된 느낌이 들어 매일 저녁 뉴스를 라이브로 꼭꼭 챙겨보았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다는, 내 안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들이 집에서 종일 뉴스 프로그램만 크게 틀어두시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이와 저녁을 먹으며 나는 매일 저녁 뉴스를 라이브로 챙겨봤다.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사진: 픽사베이)


  다섯. 여덟 살 아이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봄에는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과 그에 실려오는 꽃가루를 맞으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름에는 함께 땀 한 바가지 흘리고 들어와선 샤워 한 번으로 땀을 식혔다. 어릴 적 사먹던 소다맛 쭈쭈바를 입에 물고 이거 정말 맛있지 않느냐며, 엄마 어렸을 때도 먹었던 거라며 시답잖은 소리들을 했다. 가을엔 학교 끝나고 학원이며 병원이며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바알갛게 물든 하늘을 함께 바라봤다. “저기 구름 좀 봐, 현미밥 같이 생겼어. 엄마, 나 구름 먹을래!” 하늘의 색깔과 구름의 모양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하는 가을날이 좋았다.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더없는 기쁨이었다. 앞니가 두 개나 다 빠져서 “쓰읍”하고 입을 오므리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며 배를 잡고 웃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빼고 난 이를 머리맡에 두고 자면 밤새 이빨요정이 찾아와 튼튼한 새 이를 주고 갈 거라며 머리맡에 고이 이를 모셔두고 자는 모습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토록 근사한 날들을 선물해준 휴직 기간을, 전업맘으로서 온전히 육아와 살림에만 집중하던 시간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 두 달 넘게 남은 이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채고 더욱 힘껏 뛰어놀아야지. 까르르 웃고 투닥투닥 싸우고 잔소리도 하고 그래야지.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조금 더 붙잡아 슬라임처럼 늘리고 늘려서 오래오래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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