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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Apr 20. 2020

4차산업 시대의 유학(儒學)

선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찾는 학문적 노력을 하는 자

유학(儒學)에 관한 책을 읽을 때면 한자 풀이를 따라가느라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내용도 중언부언 반복되기도 해서 아쉬울 때가 많다. 아빠도 몇 권의 책을 읽기는 했지만 사실 유학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른다. 그래도 어쩌다 읽게 되면 마음공부에 참 좋다는 것을 느낀다. 아빠는 그나마 중학교 한문(漢文) 시간에 한자를 배우면서 중국 고전의 문장들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윤리 시간에 서양의 인문학 외에도 동양의 고전들도 꽤 많이 나오곤 했다. 신문에 한자가 병기되던 시절도 있었던 탓에 몇 자 기억하는 게 있기는 하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 아빠가 젊을 때도 맹목적인 미국과 서양에 대한 동경으로 동양의 지식을 천시하거나 시대에 뒤처진, 고리타분하고 낡은 지식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기는 했다. 요즘 너네들도 시험 목적 외에는 관심도 없을 테지.  


자본주의 하에서 유학의 지나친 구도적(求道的) 자세와 이상화가 유학의 몰락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흔히 바른말을 하면 "공자님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하며 핀잔을 주곤 했다. 예전에는 그랬다. 요즘은 이런 말 자체도 쓰지 않지? 어쨌거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공자님 말씀이 맞긴 맞다는 얘기다. 한편, 이 말이 가지는 반어적 의미는 아마도 "맞는 말이긴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또는 "옳은 말이지만 난 그렇게까지는 못해"라는 뜻이지 않나? 사실은 공자님도 이상적인 얘기를 하셨지만, 자신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며 거기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늘 말씀하셨다. 같이 노력하자고 했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게 아닌데, 모두 도(道)의 경지에 이른 것만을 기억한다. 또, 견리사의(見利思義) 즉, 눈앞의 이익을 보거든 그것을 취함이 의(義)에 합당한 지를 살피란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데 불필요해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안 취하면 남이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반대로, 이익을 취하는 과정에서 의(義)와 리(理) 따위는 쉽게 저버리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산업시대를 맞아 붕괴를 앞두고 있는 이때야 말로 유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문학, 특히 유학의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동양의 고전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유학의 현대화가 늘 아쉬웠다. 유학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니, 우선은 한자가 문제다. 정확히 번역하고 의미를 전해 줄, 그리고 한자를 최소화하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하다. 자기들만 아는 용어로 얘기하지 말고, 그리고 한자(漢字)를 쓰면 더 유식해 보인다는 유치한 생각은 접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유학의 인성론에서 얘기하는 4단, 즉 인(仁)•의(義)•예(禮)•지(智), 곧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를 말하고 이의 단서(端緖)가 되는 네 가지 마음,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의 덕목이 오히려 현대에 더 필요하다. 문제는 이렇게 훌륭하고 현대적인 사상들이 한자어 사자성어로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잘 설명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仁)을 강조한 공자님께서 실천의 방도로 늘 서(恕)의 마음을 가지라 하셨으니,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는 지금 이 시대에 너무나 부족한 용서와 배려의 마음인 것이다. 근데, 역시 한자로 풀어놓으니 와 닿지가 않는 것이다. 물론, 한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뜻글자의 특성상 한자 하나하나의 풀이가 중요하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학자들은 한자를 최소화하고 참 뜻을 찾도록 분발해야 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자각하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형식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형식, 특히 제례가 중요했던 이유는 종교적인 상징성을 가지려면 필요했던 것이다. 공자께서 "예(禮)는 사치스럽기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제사는 형식을 잘 갖추기보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이 낫다"고 하며 형식주의를 경계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두 대나무 그릇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점점 형식을 중요시 여긴 것은 역시 정치적 지배이념과 사회제도로서 고착화를 위한 종교화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이겠지. 유교와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그래서 아빠는 유교(儒敎)라는 말보다 유학(學)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유학은 생활과 학문에 대한 태도를, 불교는 참선을 통한 수도의 길을 제시한 것이라 받아들이고, 형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고전 인용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논어>, <맹자>를 인용한다고 해서 권위를 인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현대에 맞게 재해석이 필요하다.  


유학에 대해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선민의식은 버리되, 선비정신은 간직하면서 말이다. 차별적 신분제도로서의 선비가 아니라 이재를 멀리하고 인의를 따르며 학문에 정진하는 그 정신 말이다. 퇴계 이황께서 선비란 "나와 타인의 분별을 넘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찾는 학문적 노력을 하는 자"라고 하셨다. 아빠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이 얼마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잘 어울리는 자세란 말인가! 또한 선비란 '성인이라는 도덕적 완성상태를 향해 길을 떠난 구도자로, 마음을 항상 경(敬)의 상태로 두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라 하셨으니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작자들이 한 차별적 행위에 집중하지 말고 선비 원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오히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이야 말로 모두가 선비가 되는 길이 열리지 않았나. 과거 유학을 대할 때 남녀차별과 신분제에 집착하는 경향을 버려야 한다. 그런 걸로 따지면 성경과 쿠란도 만만치 않지만 동양의 고전들, 특히 한국의 유교문화에서 유독 신분제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가끔은 어리석게도 그것을 또 강조하기도 한다.  


유학은 현시대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삶의 원리는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여러 번 "덕은 도량에 따라 커지고, 도량은 식견에 따라 커진다(德隨量進, 量由識長 덕수량진, 량유식장)"라는 <채근담>의 구절을 인용했지? 쉽게 말해 아는 게 많으면 도량이 커지고, 도량이 넓어지면 덕도 커진다는 것이다. 공부하란 얘기지. 물론 우리가 흔히 보듯이 지식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배우지 못했다면 사리판단과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금 더 이 뜻을 넓히면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역시 배움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지식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쉽게 꼰대가 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혀야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덕이 있는 어른이 된다.  


사람들에게 직업이나 소득이 또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맹자의 이야기는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에 오히려 새겨 들어야 할 말일지도 모른다. 맹자가 말하길, "일정한 생업이 없는데도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무항산 무항심 無恒産 無恒心). 진실로 일정한 마음이 없으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죄에 빠진 다음에 따라가서 형벌을 가한다면 이것을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고 했다. '무항산 무항심'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소득이 없으면 올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백성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가지라고 강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소득이 주어져야 한다. 소득을 주지 않는 것은 백성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고, 그렇게 죄인이 된 백성을 형벌로 다스리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보편소득/기본소득에 대해 맹자님도 찬성한다는 뜻이겠지? 여기서 또 가려서 읽어야 하는 부분은 선비에 대해서다. 학문과 수양을 갖춘 사람, 벼슬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비, 즉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은 설사 재물이 없어도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한다고 맹자는 말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나쁜 길로 빠진다.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백성인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논어>를 보면 공자가 군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예 못지않게 시와 음악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태백>에 실려 있는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써 완성한다(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의 구절이 예악(禮樂)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사실 공자는 그 시대의 예능계 슈퍼스타였다고 하더라. 시와 예, 그리고 음악에 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공자는 심지어 음악으로써 완성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음악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인(仁)하지 못하다면 예(禮)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인(仁)하지 못하다면 음악(樂)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역시 예와 음악이 공자가 추구했던 최고의 덕목인 인(仁)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둘러서 말해주고 있다. 다시 한번 K-POP의 중요성을 또 느끼게 되지? 그리고 음악을 하는 사람도 어질어야(仁) 한다. 이건 대한민국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제일 단련이 잘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혹독한 언론의 비판에서도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일까? 아빠가 그래서 아이유와 BTS를 좋아한다. 또 힙합 뮤지션들이 구사하는 랩과 가사가 현대의 시(詩)라고 생각한다.  


유학의 현대화는 아빠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다. 아빠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거나 아직 유학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달아 유학에 대한 책을 썼는데, 우리가 읽지 않아서 유학이 요즘 인기가 없을 수도 있다. 요즘 언론이나 정치인, 또는 논평가들이 의(義)의 단서인 수오지심(羞惡之心)(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중에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즉, 쪽 팔리는 줄 모르고 오로지 남의 옳지 못함만을 떠드는 것을 보면 다시 유학의 중요성을 깨닫기는 한다. 아빠는 중, 고등학교 때 유학을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딸도 유학을 너무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국어시간이나 한문시간에 배운 것이라도 잘 기억하고 의미를 새겨 두렴. 그래서 나중에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할 수 있으면 멋있을 거야. 물론, 네가 세상에 나올 때 공자님 말씀을 좋아하던 어른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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