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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Apr 22. 2020

오빠 믿지?

신뢰(Trust)에 관한 짧은 생각

신뢰(Trust)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20년 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아빠 회사와 함께 일하는 외국계 금융기관들도 본격적인 팬데믹(pandemic)으로 전환됨에 따라 재택근무를 비롯해 다양한 이슈들이 오고 갔단다. 중국에서 처음 대규모 환자가 발생했을 때, 중국 내 지점의 인력운영을 현장근무, 별도 장소에서의 분리 근무, 백업 요원들의 재택근무 등 세 가지 형태로 조직을 나눠서 잘 대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중국 내 지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을 안 해주는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도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외화자금 유동성 이슈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달러/원 환율은 1,200원을 가볍게 넘고서는 1,300원에 근접하기도 했었지. 어떤 곳은 아빠 회사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아무 생각 없는 특이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달러 금리를 시장에서 Credit Spread 상승분만큼 올리되 Credit Line(신용공여한도)을 유지 또는 추가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믿었던 한 곳은 오히려 Credit Line을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그 후 정부에서 미국과 통화스왑 계약을 체결하고 유동성 문제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내 외화자금의 과잉 유동성이 이제야 겨우 제 구실을 했고, 정부의 발 빠른 국제공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그 기관이 Credit Line은 복원했지만 금리를 제일 높게 올렸다. 그 기관에게는 이 위기가 마무리되고 나면 신뢰를 저버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그 기관과의 거래 상당 부분을 유동성을 지원한 기관으로 돌리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인간적으로 그 담당자들과 친하고 신뢰하지만 기관 대 기관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또 위기가 왔을 때 마찬가지로 신뢰를 저버린다. 동시에 우리를 신뢰한 기관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한국 회사들은 소심한 뒤끝이 있다. 과거 1998년 IMF 위기 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계 A은행 서울지점은 외화 유동성 리스크에 빠진 국내 은행들을 상대로 선물환 마진에서 폭리를 취하며 한국의 은행들을 괴롭혔었다. 외화차입금의 만기가 도래할 때 달러를 현물에서 사고(그래서 만기가 도래한 차입금을 상환하고) 선물환으로 다시 매도하는 F/X Swap을 통해 선물환 만기까지 차입금의 만기를 연장해 오던 은행들은 이를 뽀드득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가격을 받아들여야 했었단다. IMF 위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난 뒤 살아남은 은행들의 FX 딜러들은 일제히 A은행 서울지점과의 거래를 끊어 버렸다. 그 영향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 은행 서울지점은 문을 닫고 딜링룸의 딜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근데, 다들 다른 회사의 딜러로 많이들 옮겨 갔어. 아빠가 일하는 회사에도 두 명을 채용했었다. 한국인들이 또 사람 관계에서는 그렇게 냉정하지 못하잖아.


신뢰란 무엇일까? 너는 아빠를 신뢰하니? 우리가 어떤 상품이나 브랜드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할 때는 그 조건이 상대적으로 명확하단다. 얀 칩체이스와 사이먼 슈타인하트가 <관찰의 힘>이란 책에서 신뢰 정도를 가늠하는 여섯 가지 차원을 잘 설명했다.  


진품성authenticity; 어떤 제품이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진품이라고 부른다. 그 ‘진품성’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이고 문화 의존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피자를 예로 들어보자. 뉴욕에 사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피자란 얇고 바삭한 식감을 가진 도우에 소스를 가볍게 두른 것이고, 시카고에 사는 사람에게는 두툼한 도우에 소스를 넉넉하게 뿌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도시 중 어디라도 식당 주인이 버터를 듬뿍 넣어 만든 패스트리에 케첩과 가공 치즈를 뿌린 피자를 내놓는다면 고객들은 그 식당과 그곳에서 자신들의 개념과 일치하는 ‘피자’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게 된다.

약속이행성fulfillment; 약속이행성은 ‘제품이 약속하는 기능을 그대로 실현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이 표방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제품을 신뢰하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제품은 신뢰하지 않는다.

가치value; 가치는 다른 제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 대비 품질 수준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바가지 쓴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제품을 신뢰한다.

안정성reliability; 안정성은 약속이행성과 비슷한 개념으로, 제품이 충분한 일관성을 가지고 기능을 발휘해서 그 제품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반드시 작동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뜻이다. 안정성이 있는 제품은 내일도 작동하고 모레도 작동하고 그다음 날에도 작동할 것이다.

안전성safety; 안전성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사람이나 환경에 심각한 해를 끼칠 것이라 여겨지는 제품은 신뢰하지 않는다.

의존 가능성recourse; 의존 가능성은 제품이 고장 나면 생산자나 판매자가 신속하고 정중하게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보장의 명시적·내포적 의미다. 명시적 의존 가능성에는 품질보증서, 고객센터 무료전화, 교체 방침, 환불 보장 등이 있다.


이러한 기본가정에 관한 신뢰의 하한 한계치를 상회해야 안심하고 소비한다. 그런 면에서 스타벅스는 탁월하다. 커피 품질은 진품이고, 디카페인은 정말 카페인을 뺐으며, 4,500원의 가치가 분명 있고, 오늘 주문한 커피가 어제 마셨던 커피와 같은 맛일 것이며, 테이크아웃 뚜껑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열리지 않을 것이며, 커피 맛이 이상하다고 주장하면 환불해 줄 것이다. 이렇게 브랜드의 신뢰를 쌓기까지 많은 노력이 들었다.


조직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있어서도 신뢰는 아주 중요하다. 패트릭 랜시오네는 <팀이 빠지기 쉬운 5가지 함정>이라는 책에서 제목 그대로 팀이 빠지기 쉬운 5가지 함정의 프로세스를 설명했다. 첫 번째는 '신뢰의 결핍 lack of trust'이다. 신뢰가 부족하면 동료 간에 비판과 토론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두 번째인 '충돌의 두려움 fear of conflict'이 생긴다. 신뢰가 없으니 거리낌 없는 비판을 통한 논쟁이 불가능하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괜히 논쟁을 벌였다가 공격으로 오해받기 쉽다. 따라서 세 번째 '헌신의 결핍 lack of commitment'를 초래한다. 충돌을 회피하다 보니 내 의견이 개진된 결정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주어진 결정사항에 헌신하기 어렵다. 네 번째로 '책임의 회피 avoidance of accountability'가 생긴다.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책임도 지지 않는다. 남 탓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결과에 대한 무관심 inattention to results'이다. 결국 공동 목표의 달성 여부보다는 자신의 경력이나 인지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랜시오네의 글에 공감했던 이유는 비슷한 상황이 조직 내에서 실제 발생하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작은 팀 안에서도 벌어지고, 경영진 회의에서도 생기고, 각종 Task Force Team을 조직하다 보면 더 두드러진다. TFT를 만들면 항상 각 부서의 잉여인력을 보낸다. 부서 내에서의 잉여인력들이 모여봤자 늘 거기서 거기다.  


정보와 지식에 대해서는 어때? 아빠가 지금 쓰는 이 글들을 신뢰하니? 혹은 다른 사람들이 쓴 블로그나 책을 믿는 편인가? 많은 책에서 과학이 종교를 죽이고 있다고 했지만, 진짜 종교를 죽이는 것은 구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구글을 비롯한 검색포털에 대한 신뢰는 어마어마하다. 구글은 어쩌면 'Trust'를 넘어 'Believe'다. <플랫폼 제국의 미래>에서 스콧 갤러웨이는


오늘날 구글이 현대적인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구글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은 천리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 생각과 의도를 모두 꿰뚫어본다. 우리는 구글에 질문할 때 성직자나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 혹은 의사에게도 선뜻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가령 헤어진 여자 친구를 스토킹하는 방법이나 갑자기 몸에 나타난 발진의 원인, 자신에게 변태적 취향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의 발에 유독 관심이 많은 것뿐인지도 알아볼 수 있다. (…) 사람들은 구글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신뢰한다. 구글에 하는 질문 여섯 개 가운데 하나꼴로 질문자가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질문, 즉 처음 하는 질문이다. 과연 다른 어떤 기관이나 사람이(아무리 해당 분야 전문가이거나 성직자인들) 맨 처음 하는 질문을 그토록 많이 받을 만큼 높은 신뢰를 받을까? 과연 어떤 현자가 구글처럼 질문자가 난생 처음 하는 질문을 기꺼이 하도록 마음을 자극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구글은 이제 미래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언자 지위까지 넘보게 되었다. 범죄자들이 잡히면 그들의 검색기록을 찾아보는 것은 이제 기본이 되었고, 잠재적 범죄자도 검색기록으로 가려낼지 모른다. 한때 20세기의 지혜의 신(神)은 뉴욕타임스였다. 그러나 지금 콘텐츠는 뉴욕타임스가 만들지만 구글에게 검색 및 링크를 허용한 것으로 인해 신의 지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구글이 공짜로 쓸 수 있도록 만드는 바람에 진짜 광고 수익은 구글이 챙겨간다. 물론, 그와 관련된 빅데이터도 마찬가지다. 정말 신뢰를 주는 것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수많은 블로거들과 위키피디아에 지식을 올리는 사람들, 링크된 신문사의 기자들이지만 그 공은 구글이 차지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신, Google이 공정하냐는 것이다. 구글에 저항하는 이들은 아예 검색에서 배제되게(명목은 검색 알고리즘의 업데이트다) 만들어 버림으로써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뉴욕타임스는 더 이상 검색 및 링크 허용을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는 순간 독자들의 접근이 차단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우리는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에 대해 점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신의 특성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또 영원불멸하다고 정의한다면, 구글은 '모든 것을 안다'에 핵심이 있다. 언젠가 구글이 너무 커져서 공익 기업으로 전환하라고 미국이 나설지도 모른다. 미국을 믿어야 할까? 혹은 모든 국가를 초월해서 우리의 개인정보를 관리하도록 구굴에 맡기는 것이 더 낫나? 잘 모르겠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말은 사실 상품과 비슷하게 쓰일 때가 있다. 아빠가 자주 가는 미용실 아줌마는 진짜 미용에 관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속한 대로 머리를 다듬을 것이고, 내가 내는 비용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지난번과 유사하게 머리카락을 다듬을 것이고, 가위에 귀가 잘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가 양쪽 균형이 안 맞다고 항의하면 수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신뢰는 이것만이 아니다.


너도 나중에 남자 친구를 사귀다 보면 "오빠 믿지?"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대부분의 경우 진짜 신뢰를 줬다면 "오빠 믿지?"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Trust)한다고 할 때는 미지(unknown) 상황에 대한 리스크가 낮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는(Known) 상황에서는 기능적 측면의 신뢰가 중요하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했던 미지의 상황이 벌어질 때 근본적인 신뢰 여부가 결정된다. 그 상황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상대방을 우리는 궁극적으로 '신뢰한다'고 표현한다. 아빠가 이 글 처음에 얘기했던 신뢰를 저버렸던 외국계 기관도 마찬가지다. 평상시 아무리 신뢰를 줬다고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신뢰할 수 있는 가가 중요하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재난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정부여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안타깝게도 세월호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신뢰를 잃었다. 이런 신뢰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면 한 번에 무너진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소한 내가 기대하는 것은 해 줄 수 있는 사람. 있어? 일단, 아빠는 신뢰해도 좋다. 가족은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존재이길 바란다. 네게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많지는 않더라도 몇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실망하는 경우도 결국은 이런 상황이었다. 내가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기대를 저버릴 때 우리는 가장 외롭고 배신감에 분노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신뢰에 관해서 무엇이 진실인지 아빠도 잘 모른다. 아빠는 신뢰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 그래서 아빠는 일단, 친구든 거래 상대방이든 크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뭔가를 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야 친구다. 친구가 필요로 하는 것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하되, 그 대가로 뭘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빠 경험 상 그렇게 하면 신뢰를 얻더라. 내가 신뢰를 얻으면, 그 친구도 대부분의 경우 신뢰로 답한다. 물론, 신뢰로 답하지 않았던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크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면 조금 마음은 누그러진다. 그 친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야. 누가 되었든 신뢰라는 이름에 너무 기대지 마라. 대신 사랑하면 된다. 성경에서 봤었나? 사람은 믿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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