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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y 10. 2020

신과 종교에 관한 짧은 이야기 (1)

신은 존재하는가  

언젠가 네게 신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하고 싶기는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정치와 더불어 항상 껄끄러운 주제가 또 종교 아니니. 그래서 조심스러운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네가 충분히 이 문제를 고민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너의 신념이 정해졌다면, 아빠가 하는 이야기는 그냥 신과 종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아직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로 생각하렴. 


종교의 근본적인 질문은 우선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래된 질문이긴 하다. 아직도 답은 모른다. 우리가 신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신이 있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될 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 질문을 직접 신에게 던진 사람이 있다. 모세다. 모세는 인류 최초로 신의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토록 하기 위해 모세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제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그들에게 ‘여러분의 조상의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하고 말할 때에, 그들이 제게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오?’ 하면,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여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말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 우리말 성경>


여기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주로  "I AM WHO I AM."이라 표현되어 있다. 신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히브리어 '여호와' 또는 '야훼'라는 단어를 '존재한다' 내지는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있음이다.' 내지는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름을 말한 게 아니라, 그래서 '여호와(야훼)'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 '있음'을 말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말 성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는 영어의 표현에 비하면 정말 창의적이고 절묘한 번역 아니니?  


우리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因)'도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이란 말에 맞는 한자어 발음을 빌려온 단어라고 한다. 환인이 그의 아들 환웅을 땅에 내려 보냈다. 이스라엘의 신은 아예 땅과 하늘, 빛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었지만, 우리 민족의 신화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다. 그냥 곰을 사람으로 변신시키셨지. 하지만 나름 천상족(天上) 출신의 기원을 담고 있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다시 돌아와서 신은 정말 존재할까? 파스칼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재미난 증명을 시도했다. 아빠가 통계에 대해 얘기할 때 파스칼이 페르마와 함께 도박을 통한 통계의 개념을 많이 정립했다고 했지? 여기서도 써먹는다. 간단히 정리하면, 신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데, 하나는 '존재한다'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그리고 이 신을 믿는 경우와 믿지 않는 경우를 더하면 경우의 수는 네 가지가 된다.

신은 존재한다 + 신을 믿는다 = 죽어서 천국행

신은 존재한다 + 신을 믿지 않는다 = 죽어서 지옥행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을 믿는다 = 현세를 살면서 종교인에게 보험료를 지불하는 금전적 피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을 믿지 않는다 = 영향 없음


여기서 신의 존재와 믿음에 관한 도박을 한다면, 신을 믿을 경우 얻는 것은 사후에 천국을 가거나 또는 살면서 종교단체에 약간의 금전을 지불하는 정도(중세 유럽이었다면 조금 다르다. 금전적 손실뿐만 아니라 이성과 영혼을 다 뺏기기도 했다.)인 반면, 신을 믿지 않을 경우는 지옥에 떨어지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을 믿는 것이 이익이다는 것이 파스칼의 결론이다. 현세에서의 종교단체에 일정액의 돈을 지불하는 정도의 보험으로 지옥행을 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논리는 진짜 신의 존재의 증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지, 실재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할 수는 없다.


먼 과거에 인간은 그 당시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우주의 순환, 생로병사, 운명, 전쟁 등에 대한 해석을 종교를 통해서 이해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출애굽기에 묘사된 이집트의 열 가지 재앙(핏빛 나일 강과 개구리, 이(각다귀), 파리떼, 각종 역병들, 우박, 메뚜기떼, 3일간의 어둠, 사망률 증가) 같은 것들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이 분야는 과학이 요즘 대체하는 중이다.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고, 이에 따라 인간이 신에 가까워지는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시대로 진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정교한 우주의 움직임에 신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우주의 존재 이유와 작동 원리의 신비, 수백만 번의 우연이 닿아야 가능한 생명의 탄생, 특히 인류의 탄생에 있어 가장 최상의 답은 신의 존재다. 무신론이 제공하지 못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궁극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신을 믿는 수많은 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계속 활동한다.


신의 존재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는 시도도 계속되어왔다. 

첫 번째는 존재론적 증명이다. 신은 가장 완전한 것인데, 그것이 관념으로서만 있고 존재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미 완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무슨 말이냐고? 찬찬히 읽으면 이해된다.) 

두 번째는 우주론적 증명이다. 운동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그 궁극적인 원인(제1원인 또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다. 13세기에 독보적인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오히려 1929년 허블(그래, 허블 망원경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이 아인슈타인의 정적 우주론(우주는 팽창도 수축도 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뒤집고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밝히고, 그 뒤 빅뱅(Big Bang) 이론이 등장하면서 더 주목되는 이론이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한 점으로 귀결되니 말이다.  

세 번째는 목적론적 증명이다. 자연의 질서가 합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그 설계자, 제작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추정한다. 어떤 사람은 자연과 우주를 정밀한 시계로 비유하면서 신의 존재를 설명하던데, 아마 같은 취지였을 거야. 

네 번째는 인간학적 증명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아는 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신의 관념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원인은 신의 관념보다도 더욱 우월한 실재성을 갖는 것, 즉 실재하는 신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증명이다. 도덕적 질서의 원천으로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의식이 신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논증이 가장 마음에 드니?  


한편, 신이 진짜 존재하든 안 하든, 혹은 그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신은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 곁에서 종교가 아닌 모든 것에도 스며들어 있다. 모든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 즉, 우리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법, 관습 속으로, 학문은 물론이고 문학, 미술, 건축, 음악 등 우리의 모든 삶 속에 파고들어와 문화와 문명의 중심을 이뤘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불교와 샤머니즘적 무속신앙이 결합된 문화를 많이 보여준다. 우리 문화재의 대부분도 불교 및 무속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기에다 대한민국은 종교와는 별개로 유교를 생활규범으로서 내재화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힌두의 신들을 빼놓고 인도 사람들의 삶을 얘기할 수가 없다. 수많은 신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다. 중동 지역의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는 정치와 법, 생활규범 등에 알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여전히 많은 국가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지 않다. 유대교는 아예 '율법의 종교'라고 불릴 정도로 유태인들에게 먹는 것까지 세세하게 율법으로 정하고 있다. 서양문명이라고 다르지 않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물론이고,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 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들이 만든 세계관과 문명, 그리고 모든 전쟁 속에 어디에나 신이 있다. 지금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정치역학 역시 종교에서 출발해야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는 것 역시 신의 이름을 빌려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신은 이미 우리의 문명 속에, 삶의 매 순간 속에 존재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있음이다."라는 선언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사실 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될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나 존재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아빠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신에 대해 인간이 그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독교의 신은 예외다.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신다. 대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돌로 쳐 죽이라 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신을 형상화 하고 많은 얘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신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딸, 넌 신을 믿니? 삶을 의지하는 종교가 있니? 네가 커서 신과 종교에 대해 신념을 가진다면 아빠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다만 소위 말하는 '사이비'나 '이단'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사이비'나 '이단'도 신학자가 아닌 아빠가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개념이다. 하지만, 아빠가 알기로는 최소한 교리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하는, 그래서 네 재산 또는 삶의 상당 부분 혹은 모두를 내놓게 하는 단체는 사이비라 봐도 무방하다. 또 기존 정통 종교의 교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여 잘못 가르치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 평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유를 억압한다면 이단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신과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사후에 영적인 구원을 얻고자 함도 있겠지만, 생명을 얻어 태어나서, 그래서 살 수밖에 없는 이 삶을 슬기롭게 살게 하고, 또 고단한 현세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너를 구원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너를 억압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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