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식
여전히 어려운 신과 종교 이야기를 또 하는구나. 다시 말하지만, 아빠는 신학자가 아냐. 그리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아니다. 아빠는 사실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동시에 종교가 많다고 말할 수도 있어. 아빠의 큰형, 즉 네 큰아빠는 교회의 목사잖아. 근데, 할머니는 절에 다녀. 아빠의 외삼촌, 즉 할머니의 동생이 스님이시거든. 경남 산청에 내려가면 외갓집 소유의 절도 있단다. 네 외할머니와 엄마도 절이 더 편한 사람이다. 한편, 아빠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중 한 분은 지금 수녀시다. 그분 덕분에 대학생 때 맹인을 위한 책도 녹음해서 맹인도서관에 아빠 목소리가 꽂혀 있기도 하지. 진정한 봉사를 실천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야. 아빠는 집단으로의 종교, 즉 교단이나 종단의 이름으로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권력에 기생하거나 조직의 안녕을 위해 불의에 눈 감는 정치적 행위는 싫어하지만, 종교인으로서 봉사와 희생, 또는 진리를 향한 구도의 자세를 보여주는 많은 종교인들을 보면 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삶의 지혜와 인생의 길라잡이로서의 종교는 감사하고 신뢰한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개혁이었다. 예수의 출현은 그 자체가 개혁이었다. 전쟁의 신, 이스라엘만의 신을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것은 그 신이 아니라 예수다. 그분은 낮은 곳에 임하시어 민중을 이끌었다. 예수 이전의 모세 또한 이집트에서 핍박받던 이스라엘 민중들의 혁명을 이끈 사람이다. 인도에서는 힌두교 계급사회에 대한 반발로 불교가 태어났고, 여기에 더 나아가 사회개혁의 의지로 이슬람교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천주교 역시 개혁의 몸부림이었다. 조선시대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의 시대로 가기 위해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포교에 의해 천주교가 들어온 게 아니라 스스로 교황청에 주교 파견을 요청한, 천주교사의 유일한 케이스다. 한국사의 천재들로 불리던 이승훈, 이벽, 그리고 정약용의 형제들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도구로 선택한 종교가 아니었나 싶다. 수많은 천주교도, 특히 부녀자들과 하층민들의 순교는 종교적인 이유의 의미가 물론 있겠으나 그걸 넘어선 사회개혁의 의지와 열망으로도 평가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기독교 역시 마틴 루서의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 보수 가톨릭에 저항하고, 당시의 첨단기술(인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성경 해석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건 진보적 성격의 종교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라 불렸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 속에서는 안타깝게도 미 군정과 함께 들어오면서 친일-반공주의와 결합했다. 몇몇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대중을 향한 희생적인 노력은 희미해져 갔다. 모든 종교단체가 정치에 휘둘렸지만, 특히 일부 기독교 단체가 이승만 독재 정권에 부역하고, 박정희, 전두환 두 군사독재 정권에 기생하며 친미-반공을 내세워 종교사업으로 부를 축재했다. 그런 일부 목사들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종교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 교회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낮은 곳에서 이웃과 겸손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절대다수다.
류시화 씨의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에 이런 우화가 실려 있다.
마라(인도 신화에 나오는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로,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할 때 방해하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실지 모르지만, 마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을 해도 수수께끼처럼 말해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야 하고, 무슨 행동으로도 유혹할 수 있어야 해요. 늘 그렇게 사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해요. (...) 나의 전성기도 이제 지났어요. 이제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대는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대는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을 내가 한 말들이라고 선전한다. 큰 돈을 들여 알록달록한 절들을 짓고 불단 위에 불상을 높이 세워 돈과 과일과 쌀을 끌어모은다.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에고와 부를 위해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내 가르침을 사업 용도로 이용한다. 마라여, 붓다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그대가 안다면 그대는 결코 붓다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붓다와 마라는 서로 손을 잡고 한탄의 한숨을 쉬었다.
기독교든 불교든, 모든 종교가 안타깝게도 신의 뜻보다 그 종교 자체가 사업인 건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사업을 유지해야 또 종교의 교리를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종교에 바치는 재물이 우리가 종교를 통해 얻는 삶의 위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또 인간의 경제적 논리를 내세울 수도 있을 거야. 이 또한 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논리의 장난일 뿐이다.
그러나 아빠는 마르크스처럼 종교가 계급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마약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종교가 물론 지배계급의 논리를 강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음 약한 사람들의 환상 또는 환각적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역사상 감동적인 종교적 삶을 입증해 준 수많은 사례가 있음을 기억한다. 마더 테레사는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 사람들 앞에 서서, 선교의 길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셨다. 또 마틴 루터 킹은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마하트마 간디처럼, 증오에 바탕을 둔 폭력적 저항이 아닌 보다 높은 영적 차원에 바탕을 둔 비폭력 저항으로 인종차별을 넘어서려고 했다. 아빠는 현재의 삶 이외에 기독교나 불교의 이상인 천당 혹은 극락을 크게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이 속세를 그런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런 삶을 인도해주는 가르침의 원천으로서 예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소중히 생각한다. 사후의 천당이나 극락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인간이 생을 얻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세를 지혜롭고 은혜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잡이로서의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 그런 면에서 아빠는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 신도다. 서울역 앞에서 예수교를 믿어야 천당 간다거나 부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외치는 신자는 아니지만 위대한 두 분을 동시에 마음속에 소중하게 모시고 산다.
아빠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도서부 담당이셨던 국어 선생님과 인간 구원의 방식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구원의 의미를 천국 또는 낙원에 들어가는 사후의 영적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 방식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 선생님은 토론을 위해 <성경>과 김은국 씨의 <순교자>,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의 구원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성경>과 <어린 왕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이니 설명이 필요 없지만, 김은국 씨의 <순교자>는 네가 읽었을지 모르겠다. 짧지만, 굉장히 임팩트 있는 소설이다.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1950년 11월,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 대령과 이 대위가 6·25 전쟁 직전에 일어난 목사 집단 처형 사건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열네 명의 평양지역 목사들이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중 열두 명이 처형당한 사건이다.
“목사님의 신,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에게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왜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신앙인으로서, 신도들을 이끄는 목자로서 살아온 삶을 뒤흔드는 이 질문에 신 목사는 신의 존재와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며 깊은 고뇌에 빠진다.
성 중에서는 죽어가는 이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니라. - 『욥기』 24장 12절
비굴하게 죽어간, 동료를 배신한, 구원을 내리지 않는 신에게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던 12명의 각각의 목사들에 대해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신 목사는 본인이 유다임을 자청하고 그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운다. 불의와 절망, 수난,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이다. 비참한 운명 앞에서 무력하고 무의미한 인간 존재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진실을 밝히라고 하는 이 대위에게 스스로는 신을 믿을 수 없지만 믿고 따라는 신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책에서 등장하는 순교는 신을 향한 순교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신 목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 사건을 이용하려 했던 장 대령도 부하직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희생하고, 죽은 목사의 아들 박 대위도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군의관 민 소령도 뒤처진 환자들을 위해 탈출을 포기한다. 모두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신이 내린 자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며 자비를 내린다.
신 목사가 다시 소곤거리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 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 줄 용기를 가지시오."
그는 나를 떠나 그의 신도들에게로 돌아갔다. "형제들이여, 기도합시다."
불편하고 절망적이지만 진실인 것과 아름답고 위안이 되지만 거짓인 것 중에 무엇을 택하겠는가? 자신은 믿지 않는 신을 이웃에게 믿으라 전하며 희망을 심어줘야 하는 신 목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토론 주제였다고 얘기했는데,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의 구원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 또는 천국을 말하는 종교에서는 신이라는 절대자, 또는/그리고 영적인 선지자를 믿고 따름으로서 구원을 얻는다.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며 현실의 고난을 견디라 말하는 것이지. 그러나 김은국의 <순교자>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지만 타인을 위한, 타인에 대한 순수한 희생으로 삶을 구원한다. 여전히 보통사람을 넘어서는 용기와 고결함을 바탕으로 하기는 한다. 반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원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며 그 안에 삶의 위안을 얻는 것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항상 희망이고 구원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 관계 또한 굴레가 되기도 하고 외로움의 근원이 되기도 한단다. 융 심리학에서는 결국 자신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 관계마저 던지고 스스로의 참선을 통해 구원에 이르라한다. 비록 우리는 부처님의 뜻과 달리 신으로 추앙하고 복을 빌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이 삶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역시 종교다. 종교를 갖고 신의 참 뜻을 찾아 이웃에 봉사하는 것은 분명 존경할 만한 방식이다. 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현실에서의 삶을 지탱해 준다. 내세를 믿는 자에게 천국이나 천당을 약속해 주기도 하고, 종교가 있기에 정의에 대한 약속을 믿고 타인을 위해 희생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또, 종교를 바탕으로 서로에게 희망이고 구원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종교의 힘으로 명상과 참선의 길을 조금이나마 쉽게 갈 수 있다.
일부 종교가 말하는 사후의 영적 구원은 아빠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 것은 진정한 종교인들에게 맡겨야지. 가장 인간적인 방법은 '관계'속에서 위로받는 것이다.(동시에 가장 상처받기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은 거대한 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혹은 다른 어떤 관계든지 간에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고 고난을 같이 위로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된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하게 되는, 현재의 삶 속에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위로이자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이것도 지나치면 신의 개입이 없어도 내재화된 미신들 속에 자연스럽게 죽은 부모나 배우자, 친구 귀신들의 사후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심하면 접신자를 찾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관계를 통한 구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구원이고 싶지만 그건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자식은 부모에게 구원일 수 있다. 내가 무엇이든 줄 수 있는, 그리고 주고 싶은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너는 아빠에게 작은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