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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y 12. 2020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빠는 너를 돌아볼 뿐이다

사랑하는 우리 딸, 어떻게 두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할지 고민해 보지만 쉽지 않다. 미래의 딸에게 하는 얘기니, 우리가 그 시간에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가 없구나. 이번에는 주로 삶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의 상식은 가졌으면...' 하는 이야기로 채우려고 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써야했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아주 개인적인 작은 유언으로 하고 싶다. 


아빠는 인생을 잘 살아왔을까? 모르겠다. 마흔 중반의 어느 날 내 나이를 실감했었던 순간이 있었다. 사무실에 띠동갑, 그것도 24년 차이가 나는 띠동갑이 '희망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오던 날, 마치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랬었다. 너네들이 말하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 것이지. 갑자기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었단다.  허투루 보낸 날들을 후회했고, 작은 한 순간이라도 알뜰하게 보내고 싶었다. 엄마가 싫어했지만 회사 퇴근 후 새로운 것을 배우러 다녔고, 산에도 가고, 매년 책 50권 읽기도 기록해 가면서 해왔다. 남은 삶도 그렇게 살았을까?


류시화 씨의 <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산문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죽었다.... 신이 여행가방을 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신이 말했다. "자, 아들아 떠날 시간이다."

"그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요?"

"너의 소유물이 들어 있지."

....

"나의 추억들인가요?"

"아니야, 그것들은 시간에 속한 것이지."

"내 재능들인가요?"

"아니, 그것들은 환경에 속한 것이지."

"내 친구와 부모 형제인가요?"

"아니야, 아들아. 그들은 너의 여행길에 속한 것이야."

"그럼 내 육체인 게 틀림없군요."

"아니, 아니야. 그것은 흙에 속한 것이지."

남자가 말했다.

"그럼 내 영혼인 게 확실해요!"

신이 말했다.

"슬프게도 넌 잊었구나, 아들아. 네 영혼은 나에게 속한 거야."

....

"그렇다면, 내 것은 뭐였죠?"

신이 말했다.

"너의 가슴 뛰는 순간들, 네가 삶을 최대한으로 산 모든 순간이 너의 것이었지."


아빠의 가슴 뛰는 순간들, 가장 찬란한 순간들 중의 하나는 네가 태어나던 날이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했었지만, 막상 네가 태어나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식에게 자신의 삶을 올인(all- in) 하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아빠의 가슴 뛰는 순간들, 아빠가 삶을 최대한으로 산 많은('모든'은 절대로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단다. 아빠도 아빠의 삶이 있다.) 순간들 속에 네가 있었다. 그들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많은 현자들이 인생을 여행이라 표현하더라. 목적지가 설령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가는 여정이 곧 인생이라는 것이지. 류시화 씨는 같은 책에서 여행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을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가 너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그러면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 줄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아빠는 행운이라 생각한다. 너도 매 순간 진심을 가지고 인생 여정을 즐기길 바란다.


이제 유언 삼아 몇 가지 부탁을 미리 해야겠구나. 어차피 재산은 얼마 없을 테니, 그리고 자식은 너 하나뿐이니 알아서 해라.


첫 번째 아빠의 부탁은 가망 없는 연명치료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지만, 부질없는 호흡 연장은 반대다.


두 번째 아빠의 부탁은 혹시 아빠가 죽을 때 내 몸뚱이 중 어느 하나라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내어주길 바란다. 너무 늙어서 죽는다면 그럴 가치가 있는 장기가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신이라도 대학병원에 실습용으로 쓰일 수 있도록 내어주기 바란다. 혹시 그때쯤에는 우리나라도 사망 시 장기기증이 Default 값으로 지정되고, 굳이 기증하기 싫은 사람만 거부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그렇게 되길 바란다. 


세 번째 아빠의 부탁은, 진짜 아빠가 하고 싶은 부탁은, 아빠의 죽음을(우리가 한참을 같이 더 살고 왔으면 좋겠다.) 오래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것은 보편적 진실이다. 그러나 아빠가 죽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결말이지만 슬픔은 개별적인 문제다. 쉽지 않다. 아빠도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크게 슬퍼하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펑펑 운 적이 있다. 네 할아버지는 가끔 콤콤한 청어 과메기를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 한쪽에 넣어두셨다가 적적하신 날 꺼내서 혼자 소주 한잔 하시며 드셨었다. 냄새난다고 아빠가 싫어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어느 날 과메기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면서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말았었다. 할아버지의 부재를 진심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코끝이 찡하다. 과메기를 볼 때마다 네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당신께서 사셨던 고단한 삶이 안쓰러웠는지, 그리고 서로에게 용서하지 못할 말들을 칼처럼 찔렀던 순간들을 후회하면서,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놓아드렸던 것 같다. 넌 그러지 말고 짧게 슬퍼하고 내려놓기를 바란다. 혹시 아빠에 대한 분노나 아빠에게 받았던 상처가 있더라도 오래 품지 말아 주렴. 좋은 추억만 가끔 떠올리면 좋겠다.


스승이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물병을 남자에게 주며 말했다.

“손을 앞으로 뻗어 이 물병을 들고 있어 보라. 무거운가?”

“아닙니다. 무겁지 않습니다.”

10분 후 스승이 다시 물었다.

“무거운가?”

“조금 무겁지만 참을 만합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스승은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떤가?”

“매우 무겁습니다.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했다.

“문제는 물병의 무게가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가이다. 과거의 상처나 기억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래 들고 있을수록 그것들은 이 물병처럼 그 무게를 더할 것이다.”


아빠를 내려놓고 넌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바란다. 그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빠만 너를 돌아볼 테니, 넌 앞으로 날아가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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