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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Apr 23. 2020

자기 주도 학습

무지한 스승

2020년, 네가 고등학생이 되었기도 했고,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해서 최신 노트북을 사 줬다. 대화면이면서도 가벼운 놈이라 아빠가 사용하던 노트북의 2배 가격이더라.(다행히 이모들이 많이 지원해 줬다. 대학생 때까지 쓰라고는 했지만 분명 그전에 액정 한 번 깨 먹을 듯한 불길한 예감은...) 학교와 학원에서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고, 방송으로 설명을 듣는 것이 공부일까? 아빠 기억에는 결국 내 시간을 투자해서 책과 씨름해야 내 머리에 남았던 것 같다. 너도 분명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본 경험이 있다. 사실 모든 생명들은 원래 태어나서 많은 것들을 스스로 배운다. 네가 처음 말을 했을 때도 분명 엄마 아빠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네 머릿속 뉴런들의 엄청난 창발적 활동을 통해 스스로 깨친 것이다. 자전거도 아빠가 몇 가지 조언을 해 주긴 했지만 스스로 익힌 것이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선생님한테 설명은 들었지만 수많은 연습을 통해 네가 익힌 것이다. 네가 처음 라면을 끓일 때도 봉지 뒷면의 설명을 읽고 스스로 끓였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학원을 보내주고, 동영상 강의를 위해 노트북을 사 주면서 흔히 말하는 '스스로 학습', '자기 주도 학습'을 네가 할 수 있는지 늘 걱정이었다. 옳은 방법일까. 엄청난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네가 요구하니까 들어주기는 하는데, 단지 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차원은 아닌지 걱정도 있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는 <무지한 스승>이란 책에서 교육의 위계성과 비민주성을 이야기한 바가 있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는 바람에 네덜란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조제프 자코토가 1818년 루뱅 대학 프랑스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되어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그는 마침 출간된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이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가장 기본적인 것도, 심지어는 철자법과 동사변화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 단어와 그 단어들이 어미변화하는 이치를 혼자서 찾아냈다. 우연히 시작된 이 실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은 내용에 대해 생각한 바를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했다.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놀랍게도 거의 작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쉽게 말해 스승이 가르칠 필요가 없이 학생들이 알아서 습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 내지는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대부분 훌륭하신 선생님들은 교육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스승의 본질적 행위는 설명하는 것, 지식에서 간단한 요소들을 끌어내는 것, 그리고 지식의 단순한 원리와 젊고 무지한 정신을 특징짓는 단순한 사실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잘 짜인 점진적 순서에 따라 가장 단순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정신을 이끌고 가면서 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었으며, 이 둘은 참으로 하나의 동일한 운동이었다. 이렇게 앎을 정연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판단과 취향을 형성하는 가운데 학생은 사회적 용도가 그에게 요구하는 높이만큼 성장한다. 그리고 학생은 그것 '앎, 판단, 취향'을 그 용도에 맞게 이용할 준비를 한다. 


이 정도로 이끌어 주는 스승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걸? 그러나 자코토는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설명의 원리라는 것이, 우월한 지능을 가졌다고 간주되는 스승이 자신의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춰 전달하고 동시에 학생이 이를 이해했는지 검증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원리 하에서는 학생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보 만들기"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설명을 듣는 것은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작업이며, 이는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에 복종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자코토는 지능의 위계는 허구이며 모두 동일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제프 자코토를 사로잡은 계시는 다음으로 귀결된다. 설명자가 가진 체계의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이다.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무능한 자로 구성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설명은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 


책에 쓰인 텍스트가 아니라 스스의 말로 전달되는 설명이 학생의 정신에 더 분명하고 더 잘 새겨진다는 전제가 과연 맞을까? 아빠도 가끔 직원들에 대한 업무교육이나 과거 모 교육센터에서 파생상품을 가르칠 때 고민이 되었던 지점도 이것과 비슷하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한계 안에서만 이해한다는 문제 말이다. 아빠가 파생상품에 대해 책을 읽고 경험한 것들 중에서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한 다음, 그 내용들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배우는 사람은 본래의 내용 전체를 다 습득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빠가 설명한 것도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시에 아빠가 강사로 남기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또 필요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그중 일부는 집에 돌아가 스스로 텍스트를 연구하고 수식을 그려보고, 거래구조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화살표를 그려 봤을 것이다. 그런 친구들은 아빠를 뛰어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보고 공부한 학생들의 사례를 통해서 학생들이 스스로 익혔다는 것이 중요했다. 책을 쓴 페늘롱의 지능과 프랑스어에 상응하는 네덜란드어 표현을 번역한 자의 지능,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우고자 한 초심자의 지능으로 만들어 낸 것이며, 설명자의 지능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여기에는 "의지"가 중요하다. 사람은 배우려는 의지가 있을 때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랑시에르는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의지가 다른 의지에 복종한다 할지라도, 한 지능의 행위가 바로 자신의 지능에만 복종하는 것이 해방인 것이며,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네 가지 한정을 따라 산출될 수 있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 여기서 무지한 스승 또한 해방하는 스승이라면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도출되는 것이다. 즉,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본 경험이 다 있다. 그래서 자코토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승의 앎이나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지능이 쉼 없이 실행되도록 강제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선생은 학생의 의지를 강제하지만, 그것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며, 학생은 그의 지능을 스승의 지능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율적으로 책의 지능과 씨름하게 하는 것이다. 스승은 오로지 학생더러 구하던 것을 계속 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학생의 앎의 의지를 지지하는 것이다. 즉, 교육은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관계 맺고,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관계 맺도록 하는 것이며, 랑시에르는 의지와 지능의 관계의 이러한 분리가 ‘지적 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역시 교묘한 지능적 위계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들이 사실 스승의 근본적인 두 가지 행위다. 스승은 질문한다. 그는 말을 명령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든 또는 스스로를 단념하든 지능의 발현을 명령한다. 그는 이 지능이 하는 일이 주의 깊게 이루어지는지, 이 말이 강제를 피하기 위해 아무거나 되는 대로 주워삼킨 것은 아닌지 검증한다. 그러려면 솜씨 좋고 더 유식한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인가? 반대로 유식한 스승은 자신의 학식 탓에 방법을 망치기 십상이다. 유식한 스승은 대답을 알고 있으며, 그의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학생을 그 대답으로 이끈다. 이것이 훌륭하다는 스승들의 비밀이다. 질문을 통해 그들은 학생의 지능을 조심스럽게 이끈다. 학생의 지능이 작동할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지능을 혼자 내버려 둘 정도까지는 말고. 각각의 설명자 안에 잠자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하나씩 있다.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지적 악(惡)은 ‘자기 무시’라고 말하면서 ‘나는 이해 못 하겠소.’란 말은 ‘나에겐 그것이 필요 없소.’라고 토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즉 나는 나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자리에 부합하는 것을 알면 충분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실 아빠도 19세기 프랑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해설과 설명이 필요해 보이며, 철학적 논증에 익숙해져야 온전히 책을 이해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이라는 것이 지적 위계, 즉, 가르치는 이가 더 잘났다는 것을 전제함에는 깊게 공감한단다. 그래서 동등한 지능을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가르친다는 것이 '바보 만들기'를 넘어 스스로 학습이 되려면 역시 '의지'와 '강제'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공감한다. 아빠도 과거에 회사 내 선임들도 잘 모르는 새로운 것이 나왔을 때, 따로 배울 방법이 없었기에, 스스로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내가 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적 강제'가 있었기에 다양한 책들을 찾고, 아마존에서(그때는 아직 서점만 하던 시절인데..) 다른 '지능'들을 빌려 공부해 나름 전문가(물론, 지금은 아니지만)로 인정받았던 경험이 있다. 또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울 때 원래 일본어를 공부하려고 왔으니 당연히 '의지'가 있었고, 아르바이트가 끊기지 않으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하는 '상황적 강제'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일본어를 익혔다. 무식한 스승 밑에 뛰어난 제자가 나오는 경우를 본 적 없니? 유능한 스승 아래에서는 오히려 그저 평범한 제자들만 쏟아지는 경우도 흔하지 않든? 그래서 자코토의 말이 적어도 아빠에게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모든 부모가 바라는 '자기 주도 학습'의 원형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애들이 '의지'는 없는데, 부모가 '강제'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기는 하다. 바로 이 지점이 부모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다.   


어젯밤 수학학원을 다녀와서 씩씩거리며 아빠에게 수학 증명 문제를 이야기했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내 준 문제를 네가 아는 다른 방법으로 증명해 냈는데, 선생님이 처음에는 칭찬했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를 빼먹고는 네가 틀렸다고 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집에 오면서 과학고 간 친구를 비롯해 몇몇 친구들과 SNS로 재검증을 한 다음 아빠에게 억울하다고 했다. 아빠는 네 증명의 방식이 맞는지 (사실 잘 못 알아 들었다. 들었더라도 아빠가 판정을 못했을 거야.) 보다는 선생님과 네가 동등한 지능을 가졌으며, 우월한 지능을 가졌다고 간주되는 선생님이 자신의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춰 전달하고 동시에 학생이 이를 이해했는지 검증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즉, 스스로 증명했으면 만족하라고 말이지. 넌 "뭔 소리야?"라며 아빠가 사다 놓은 오니기리만 맛있게 먹었다. 그러게, 그게 다 뭔 소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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